[창4:25-26]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담은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첫째 아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첫째 아들은 집을 떠나 놋 땅으로 떠났습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난 폭력은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문제는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형태로든 공동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다양한 사람들이 생깁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은 그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에게는 충격적인 일입니다. 얼마나 끔찍했을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결국 두 명의 아들을 다 잃은 슬픔을 겪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항상 영향을 받는 사람들, 불편해지는 사람들, 상처를 입는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살피는 사랑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하나의 문제는 언제나 공동체에 영향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문제의 회복은 공동체가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 사이에 셋이라는 아들이 생겼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기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상실의 시간을 견디어냈을 것입니다. 회복을 위한 애도가 있었고 상처가 만져질 만큼의 시간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상처와 아픔을 위로하시며 자녀를 허락했습니다. 아담은 셋을 낳으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비록 아벨은 죽었지만 아벨의 자리를 대신할 또 다른 아들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물론, 오해될 만한 표현입니다. 셋은 결코 아벨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도 그렇습니다. 아벨은 믿음이 있는 아들이었고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셋으로 아벨을 대신하거나 하시지 않습니다. 아담에게도 셋이 아벨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말로 대신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תַּחַת(타하르)]라는 단어입니다. 여러 의미가 있는데 그 의미들 중에 ‘~을 대신해’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것은 어떤 사람의 지위를 계승할 때 사용됩니다.
즉, 셋은 아벨의 지위, 아담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의 사람의 자리를 계승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이유로 ‘셋’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도 기록이 됩니다.
[눅3: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아마 아벨이 죽지 않았다면 아벨이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안타까운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으로부터 이어질 믿음의 계보는 셋이 이어받게 된 것 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납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앞에 기록되었던 것처럼 셋의 후손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4장은 셋의 아들 에노스까지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에노스 때에 특별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의미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יְהֹוָה(예호바)]는 지존자, 영원하신 분을 의미하며 하나님을 말합니다.
가인의 계보를 보면 문명과 문화의 발달은 기록되어 있지만 라멕의 복수와 폭력으로 일그러진 죄악상이 기록되어 있는 반면 셋의 계보를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시 생각하게 됩니다. 가인도 아담의 아들이고 셋도 아담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만들어가는 공동체의 모습은 조금 다릅니다.
셋은 아벨의 자리를 이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이어갔고 그의 영향력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 스스로를 다시 점검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만들어가는 사람이었을까요?
[묵상을 위한 질문]
1. 여러분은 삶에서 어떤 예배를 만들어가고 있습니까?
2. 말씀을 묵상하며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에 만들어가고 싶은 예배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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