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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3:18~19

by 기대어 보기를 2025. 6. 7.

[골3:18-19]
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여성분들이 싫어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골로새서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엡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벧전3: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베드로전서에는 그래야 하는 이유가 설명되어 있어 어떤 목적이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명령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복종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복종’이라는 헬라어에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ὑποτάσσω(휘포탓소)* 라는 동사로 그 의미는 복종하다는 의미입니다. 말 그대로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렇게 하는 것이 주 안에서 마땅한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남성들은 환호하고 여성들은 불편해지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복종하라’는 명령형 표현이 너무 강합니다. 이것은 마치 강제하는 명령으로 힘에 의한 굴종을 요구하는 듯이 보입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사회적인 지위가 낮아서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거나 순종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당시에는 그러했습니다. 여성의 인권은 남성의 인권과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로 낮았습니다.

이런 부분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발견하게 됩니다. 당시 고대 사회의 현실과 가치관이 성경에는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권’이라는 가치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의 문화가 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아내와 남편의 사회적 지위의 차이, 성 역할의 차이 등을 당연시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마치 노예라는 제도가 얼마나 비 인격적이고 잘못된 것인지 깨닫지 못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문화 속에서도 사실 성경은 여성이나 어린아이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소외시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과정(스스로를 낮추시고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죽기까지 복종하신)만 생각해도 성경은 결코 누군가의 존엄을 무시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결코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표현들은 분명 불편해 보일 수 있습니다. ‘복종하라’는 명령형 표현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을 핑계로 남편들은 아내들에게 ‘명령’ 혹은 ‘지시’ 등을 할 수 있는 걸까요?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남편들아 아내들을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8절에 비해 표현이 순화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여성과 남성의 불평등한 대우가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말씀은 오히려 여성들은 환호하고 남성들은 불편한 말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두 가지 실천해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는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이며 또 하나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괴롭게 하지 말라에서 ‘괴롭게하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πικραίνω(피크라이노)* 입니다. 그 의미는 가혹하게 만들다, 쓰라리게 하다, 비참하게 하다입니다. 

사실 이것 만으로도 18절의 말씀은 완전히 상쇄되어 버립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명령하는 것이 비참하다고 판단이 되신다면 남편은 아내를 비참하게 만들면 안 되기에 사실상 명령하지 말라는 것이 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부당한 것을 요구하여 가혹하게 할 수 없고, 마음에 상처를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 부분, 아내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은 남편들에게 매우 세심한 삶의 배려와 공감을 요구합니다. 남편들에게는 매우 고난도의 과제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 방,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사랑은 *ἀγαπάω(아가파오)* 입니다. 결코 남편이 여성의 아름다움을 보고 사랑한다거나 이성 간에, 아내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그런 의미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랑의 원초적인 개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예수님이 우리를 향했던 사랑이고 부모의 자녀를 향한 사랑에 어느 정도 녹아 있는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표현은 달콤해 보이고 따뜻해 보이기에 여성에게는 18절처럼 ‘복종’이라는 말을 쓰고 남성에게는 인격적인 ‘사랑’을 쓴 것도 표현에 있어 불편함이 있겠지만 ‘사랑’이라는 것을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복종’과 ‘사랑’은 차원이 완전히 다릅니다. 

가령 복종이라는 말은 사회적 신분의 차이에서 발생합니다. 이를테면 군인들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는 이유는 단지 사회적인 신분의 차이, 스스로에게 주어진 역할의 차이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존경, 존중, 사랑과 같은 마음이 담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저 복종해야 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복종할 수 있습니다. 

부부사이에 이와 같은 관계가 형성되면 어떻게 될까요? 정말 끔찍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거나 사랑하지 않고도 그저 남편에 요구를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 관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의 관계가 결코 아닙니다. ‘복종’이라는 말은 그런 관계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어떻습니까? 편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단어지만 사실은 한계가 없습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빌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신 과정입니다. 사랑이 만들어낸 일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죽기까지 복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기에 대신 죽을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성분들은 이 말씀을 불편해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 상호 책임 있는 관계를 가져야 함을 보여주는 말씀일 뿐입니다. 누구에게 권리가 더 있고 책임이 더 많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메시지가 있는 에베소서 5장 22절의 바로 앞 구절로 오늘의 묵상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엡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묵상을 위한 질문들.                                                                          
1. 최근 배우자가 요구했던 잘 지켜지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2. 배우자를 위해 오늘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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