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7-8]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죄가 가져오는 비극이 그려져 있습니다.
가인은 분노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던 이유는 믿음 없이 드린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인의 분노는 믿음없이 드린 자신의 제사가 문제였으나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를 드린 동생 아벨에게로 향합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들로 불러냅니다. 아마 들로 같이 나가자고 했을 것입니다. 아벨은 형과 함께 들로 나갑니다. 그리고 그 둘이 들에 있을 때 가인은 자신의 동생을 죽이였습니다.
처죽이다는 말은 [הָרַג(하라그)]라는 단어로 세게 때리다는 의미입니다. 살해하다는 의미 입니다. 가인은 동생을 손이나 혹은 도구로 세게 때려서 사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의 행동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의 제어하지 못한 분노는 자신의 동생을 무참히 살해하는 끔찍한 죄악을 저질러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가인에게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노는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분노가 모두 죄는 아니고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면 폭력의 형태로 표출되어 버립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가인처럼 끔찍한 죄악은 행하지 않았을지라도 제어하지 못한 분노는 누군가를 향한 폭력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가장 사랑하고 아껴야 할 소중한 사람들에게였습니다. 가족 안에서 분노가 표출되면 그 분노의 방향은 항상 가장 연약하고 나약한 사람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를테면 어린 자녀에게로 향합니다. 부모의 분노는 자녀에게로 흐릅니다. 저는 자녀와 대화를 하다가도 어떤 순간에는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면 목소리가 커지거나 얼굴의 안색이 변하기도 하는데 그 순간 자녀의 입술이 떨리거나 눈동자가 흔들리는 모습을 봅니다.
대화 이후에 후회를 하고 그때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픕니다. 언제나 사랑한다고 말하고 부모로서 지키고 보호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살아가면서 자녀를 향한 폭력, 물리적 폭력이 아니더라도 정서적 폭력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남습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문이란 [פֶּתַח(페타흐)]입니다. 히브리어로 입구, 문, 도시의 성문을 의미합니다.
문은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나아갈 때, 또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때 통과하는 경계입니다. 그곳은 닫힘으로써 보호의 기능을 하며 열어둠으로써 나아감의 기능을 합니다.
그 사이에 있는 것이 문입니다. 죄는 그곳에 엎드려 있습니다. 이해와 수용, 기다림의 공간과 분노와 미움의 공간 사이에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은 그런 폭력적인 것들을 만들어내는 상황을 막아주기도 하고 그런 상황으로 나아가게 하기도 합니다. 죄는 그 사이에 있습니다. 엎드려 있습니다. 그래서 죄로 넘어가는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설 때 우리는 죄가 만들어내는 결과들에 나뒹굴게 되어 버립니다.
제어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포용과 수용, 기다림과 이해, 따듯한 배려에서 거절과 분노, 화냄과 시기, 질투의 마음으로 건너가는 문의 경계를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시편 1편의 말씀을 읽어보면 의인과 악인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시1:1-4]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의인, 복이 있는 사람들은 마르지 않는 물이, 내면을 살찌우고 건강하게 하는 물이 있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습니다.
그러나 악인, 사실 악인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악에 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늘 하나님의 말씀처럼 문에 엎드려 있는 죄에 진 사람들, 죄를 제어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문이 열려 그 안으로 바람이 불어올 때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날아가버립니다. 뿌리가 없고 서 있어야 할 마음의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일까요?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15:5-6]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본이 되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지 않는 시냇가에 심긴 포도나무이며 우리는 그 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에게 거하면 우리는 바람에 불려 날아가지 않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면 마르고 잎사귀는 떨어져 바람에 날려가고 불에 던져지는 마른 가지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의 마음이 죄의 문을 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그 해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노 외에 우리의 마음을 죄로 넘어가는 문이 열릴 때 잠시 멈추고 예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최근 문에 있는 죄를 넘어선 일은 무엇입니까?
2. 자신에게 취약한 문 너머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어떻게 하면 죄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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