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9-16]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오늘 말씀은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살인이라는 끔찍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찾아 묻습니다.
“네 아우가 아벨이 어디 있느냐?”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닙니다. 가인에게 아벨에 대해서 물으시는 것 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에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반문합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책망합니다. 그리고 가인은 죄로 인해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밭을 갈아도 그 효력 즉 수고하고 노력하여 경작을 하더라도 열매를 거둘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 하십니다. 피하며 유리하는 자란 이리저리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처럼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표현하는 악인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시냇가에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바람에 불려다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가인의 말은 상식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가인은 하나님이 내리신 벌이 너무 커서 지고 다니기에 무겁다고 말합니다.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악함과 함께 분별력 없는 모습을 봅니다.
가인이 한 일은 자신의 친동생을 쳐서 죽인 일입니다. 한 사람의 존엄을 짓밟아 사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한 사람의 꿈과 인생, 그의 사랑하는 가족에게 엄청난 고통과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런 죄를 저지른 가인은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고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가인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책임을 지려했던 것일까요?
가인은 자신이 땅에서 떠돌이의 삶을 살아가면 자신을 만나는 사람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하소연합니다.
본인은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으면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죽는 것은 두려워하고 그것이 너무 가혹하다고 하소연합니다.
마음이 씁쓸합니다. 가인의 모습이 한심해 보이지만 가인을 책망하고 미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런 가인의 모습을 보면서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사실 우리도 가인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불편하게 하는 일들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나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의 괴로우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반면 타인으로부터 조금 불편한 상황을 만나면 얼굴이 일그러지고 마음속으로 악한 생각을 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법원으로 판결을 받을 때 자신의 형벌이 적당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행한 어떤 폭력적인 일들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도 잘하지 못합니다. 행한 일과 상관없이 당장 나에게 피해가 오고 괴로움이 생기면 그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 결국 사랑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사랑이 없으니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온갖 모함과 모욕과 폭력 앞에 고통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사실 그 모든 상황을 역전시키시고 세상을 심판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다 감당하시고 진실로 죽으셨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 모든 것을 다 견디시고 참아내시며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사랑하는 자녀가 있어보니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가인은 참 비겁하고 악해 보이지만 근본 원인은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호소에 응답하셔서 가인을 보호하는 표를 줍니다. 그 표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표는 가인이 죽임을 당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가인이 말한 데로 가인에게 지워진 책임이 너무 무거워서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복수를 싫어하시고, 하나님은 생명을 사랑하십니다. 비록 가인이 끔찍한 죄를 저질렀으나 하나님은 그 죄가 또 다른 복수극으로 끝나는 죄를 싫어하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가인은 그 표를 가지고 에덴 동쪽 놋 땅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최근에 자신의 잘못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본 경험은 무엇입니까?
2. 누군가에게 미안한 감정이나 마음이 있을 때 주로 어떻게 하시는 편입니까?
3. 하나님께 회개하고 상대방에게 사과를 하신 경험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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