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1-1]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아담과 하와 사이에 자녀들이 생겼습니다. 첫째의 이름은 가인입니다. 둘째의 이름은 아벨입니다.
가인은 자라면서 땅을 경작하는 일을 했습니다. 아벨은 양을 키우는 일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이 둘은 각각의 소산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곡식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는데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궁금증들이 생깁니다. 왜 아벨의 제물은 받았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을까요?
이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가령 아벨의 제사는 피흘림이 있는 제사이고 가인의 제사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흐르는 제사와 희생의 의미를 생각하면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가인은 곡식의 소산물을 드렸고 그것은 피흘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중에는 피흘림 없는 제물들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흘림의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수 있는 의미는 있지만 그것 때문에 가인의 제사를 받지는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히브리서에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 지점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참된 조건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린 예배인가 아니면 믿음 없이 드린 예배인가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그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이고, 겉모습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을 꿰뚫어 아시는 능력이 있으시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배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배라는 것은 물리적인 교회 안에 모여서 실행하는 종교적인 형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배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שָׁחָה(샤하)]입니다. 이 단어는 굽히다, 낮추다, 엎드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 굽히고 낮추고 엎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제의의 형식으로 행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이와 같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몸이 곧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삶 속에서 예배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엎드리며 살아가는 것 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어떤 것은 결정하거나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다양한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은 그런 선택과 판단의 순간에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 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일까요?
이어지는 가인의 모습 속에서 예배자의 삶에 대해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았을 때 가인은 안색이 변했습니다. 가인은 분[חָרָה(하라)]한 감정 즉, 타는 듯한 분노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묻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화가 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화가 날 일일까요? 왜 가인은 화가 난 것일까요? 그리고 누구에게 화가 난 것일까요?
지금의 가인의 모습에 ‘예배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배자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굴종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내 생각을 낮추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내 판단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 입니다.
가인은 지금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있지 않습니다. 가인이 예배자의 모습을 가진다면 가인은 분냄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엎드림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했습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삶이 예배가 되었던 순간이 있습니까?
2. 어떻게 하면 삶이 예배가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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