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2:20-23]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우리는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은연중에 이분법적인 세계관에 물들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어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이분화된 세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초등학문’과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구도가 익숙합니다. 세상과 교회, 거룩함과 속됨, 세상의 원리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세상의 초등학문, 여기서 초등학문이란 기초적인 단계의 지식으로 낮은 지식의 뉘앙스가 있지만 *στοιχεῖον(스토이케이온)* 이라는 단어로 원리와 기초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세상의 원리와 기초에 대한 학문, 지식, 경험 등을 일컫는 것으로 세상의 이치와 법칙 등을 포함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법도와 원리원칙을 그리스도인은 따르지 않아야 한다. 본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것, 한 때 유행했다가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말을 들으면 고개를 끄떡이며 수긍합니다. 세상의 것은 원래 그런 것이고 우리는 세상과 반대되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그리 건강한 시각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초등학문이 무엇일까요?
23절에서 이런 것들 즉, 세상의 초등학문이 어떤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육체를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구절을 묵상하면 고린도교회 안에 침투하는 초등학문은 앞에서 말씀했듯이 세상의 기초원리와 학문이지만 조금 범위를 좁혀서 오늘 나누는 본문에서는 육체를 따르는 것을 금하는 방법임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육체의 소욕을 절제하고, 경건하고 겸손하게 살아가게 하는 지혜입니다. 바로 ‘금욕주의’ 입니다.
21절에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규칙들, '~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금욕죽의적 표현입니다. 여기에 다양한 것을 가져다 붙일 수 있습니다. 가령, ‘술’을 가져다 붙여 보겠습니다.
술은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것과 같은 규칙입니다. 이 규칙은 사람들을 금욕적으로 살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면 좀 더 경건한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이 금욕주의는 여러모로 종교적 가치관과 잘 맞물립니다. 율법조항도 우리를 부정하게 하는 것은 붙잡지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금욕주의는 ’고행‘의 방법도 소개합니다.
사람의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가 결합해 구원을 이룬다는 가르침, 죄를 지은자는 회개와 속죄의 표시로 육체적 고통을 감뇌하는 고행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 그래서 실제로 어떤 수도승들은 유혹을 이기거나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시밭에 뒹굴기도 했고 종교개혁가 루터도 비아 돌로로사라 불리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걸어간 길인 돌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기도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행 중 로마서 1:17절 말씀을 통해 믿음의 은혜를 깨닫고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이라는 기치로 종교개혁의 불꽃을 쏘아 올립니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금식과 같이 육체의 소욕을 절제하는 것은 경건에 유익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금욕적인 삶의 강조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감정의 틈을 파고들어 십자가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더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면 어떤 금욕적인 삶을 살아야 더 성숙하다거나 더 높은 차원의 경건을 실천한다거나 더 영적인 단계에 올라갔다는 생각에 빠지게 합니다. 거기는 목마름을 계속 느끼게하고 은연중에 권위의식도 가지게 만들어버립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느냐?” 이것 외에 구원의 필요조건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것 만으로 온전히 충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몸을 해치는 좋지 않은 육체의 소욕을 절제하는 것은 우리에게 분명 유익이 있습니다. 그것을 끊어내고 절제하는 세상의 방법과 원리가 있다면 배우고 실천하십시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외에 고행이나 금욕적 삶을 추가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 만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은혜 안에 자유함을 누리십시오.
묵상을 위한 질문들.
1. 스스로 실천해 보신 금욕적인 삶은 무엇입니까?
2. 경건에 유익이 되는 절제나 금욕적 생활은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3. 경건한 삶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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