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창조를 마친 이후에 하나님의 소감이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고는 그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기록을 보면 항상 반복되었던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시기에 좋았더라’ 입니다.
‘좋았더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טוֹב(토브)]라는 단어로 선한, 좋은, 훌륭한, 아름다운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선하고 좋고 아름답고 훌륭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랬다는 것 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러했을까요? 아름다운 자연경관, 웅장하고 위대해 보이는 대자연의 모습, 그 속에서 살아 숨시는 정말 다양하고 다채로운 동식물들의 모습들 일까요?
대자연의 신비로움을 담은 자연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우리도 충분이 감동을 받고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고 있는 자연과 그 속에 살아 숨시는 모든 동식물들이 아름답고 경이로운 것만은 아닙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손발이 없고 물컹거리거나 미끌거리는 생명체들에 대해서는 불편한 감정들이 있습니다. 아름답게 보이지 않고 때로는 무서운 감정도 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세계는 분명 그런 생물도 포함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언급한 그런 생물들을 싫어하는 분들은 꽤 많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 눈에 또는 우리의 감정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는 동식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범주 안에 다 들어갑니다.
왜 그런 걸까요? 저는 하나님이 보시는 시각, 하나님이 좋다고 말하는 기준은 외적인 기준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수려하고 아름다워서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구현되어 나타난 모든 동식물, 자연은 ‘생태계’이기 때문입니다.
생태계는 생물을 살아가는 방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를테면 생산자(풀, 나무, 식물, 조류)가 있고 다른 생물을 먹고 살아가는 생물 즉 소비자(동물과 인간)이 있고 그리고 죽은 생물의 몸을 분해해 흙으로 되돌리는 분해자(세균, 곰팡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순환이 일어나고 그 안에서 균형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각기 종류대로 생물들을 창조하셨지만 그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생태계로 만드셔서 그 생명의 충만함이 순환하며 유지되어 세상이 생명으로 충만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인간이 있습니다. 28절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이후에 소위 문화명령을 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4가지 명령이 있습니다. 생육하라, 번성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인류는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역사를 밟아온 것 같습니다. 성경을 알았든 몰랐든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것은 다소 폭력적인 단어로 이해됩니다. 히브리어 단어의 뜻도 그렇습니다.
정복하라 [כָּבַשׁ(카바쉬)]는 발로 밟다, 복종시키다는 의미입니다.
다스리라[רָדָה(라다)]는 짓밟다, 정복하다는 의미 입니다.
역시나 폭력적인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잠시 멈춰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렇게 폭력적인 삶을 살아가라고 명령하셨을까?
우리가 성경 속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폭력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결코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생명을 존중하고 창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연도 ‘양육강식’의 법칙이 존재하지만 더 큰 의미로 ‘생태계’로써 순환하고 유지되는 원리로 만드셨습니다.
그런 생태계에 폭력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을 하나님이 두시려고 하셨을까요? 심지어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이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사람에게 주어진 문화명령이 심히 좋으셨다는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즉, 사람은 실제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을 파괴해 버릴 수도 있고 훼손된 자연을 복구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그런 능력을 지닌 사람을 두고 심히 기뻐하셨고 그런 사람이 생육하고 번성하기를 원하셨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사람은 이 생태계의 균형자의 역할을 맡은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생태계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들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연을 정복하고 이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생명이 충만하도록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함께 공생할 수 있도록 조정자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을 주제로 생각해 본다면 지금 우리는 이 균형이 무너지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라는 말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폭력적으로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려고만 했던 역사의 결과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계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문화명령 속 의미를 다시 돌아보며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움직임을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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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을 위한 질문]
1. 여러분의 자연생태계에 대한 관심도는 어느 정도라고 생가하십니까?
2. 생태계의 조정자로서 삶을 살아간다면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에서 바꾸어내어야 할 것들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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