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7:1-23]
1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2 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3 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4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5 이삭이 그의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6 리브가가 그의 아들 야곱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7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내가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8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9 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10 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서 그가 죽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11 야곱이 그 어머니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12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13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14 그가 가서 끌어다가 어머니에게로 가져왔더니 그의 어머니가 그의 아버지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더라
15 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 또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히고
17 자기가 만든 별미와 떡을 자기 아들 야곱의 손에 주니
18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르니 이르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19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20 이삭이 그의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이르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21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져보려 하노라
22 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이르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23 그의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분별하지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이면서 슬픈 이야기이며 동시에 오늘날에도 진행 중인 이야기입니다.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삭은 이제 노인이 되었습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시각 기능을 많이 상실했습니다. 잘 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삭은 이제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듯합니다. 그래서 장자인 에서를 부릅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자신을 위해 사냥을 하고 좋아했던 별미를 만들어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죽기 전에 그 음식을 먹고 마음껏 에서에게 축복을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단어 중에 우리가 좋아하는 단어인 ‘축복’은 [בָּרַךְ(바라크)]라는 단어입니다. 그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복의 의미가 아닙니다. 직접적인 의미는 무릎을 꿇다는 의미입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굴종의 의미로 우리가 생각하는 복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축복하겠다고 했습니다. 바라크의 기본 의미만을 보면 이삭이 에서에게 무릎을 꿇겠다는 이상한 상황이 되어 버립니다.
바라크 즉, 무릎을 꿇다는 것은 오직 한 대상만을 의미합니다. 그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바라크라고 하고 그것을 번역한 것이 축복입니다. 어쩌면 무릎을 꿇다는 의미의 단어를 억지로 축복으로 번역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지만 전혀 그 의미가 상충되거나 위배되지 않습니다.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할 수 있는 관계는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복입니다.
이삭이 에서를 축복해 주겠다는 말은 에서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간구하고 기도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이삭은 아들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을 구합니다.
이삭이 지금 에서를 축복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 ‘유언’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제산 등에도 공적인 효력을 지닌 것 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에서를 장자로써 단순히 장자권을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의 경험을 비추어 볼 때 이어질 영적 계보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이삭에게도 형이 있고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아브라함이 보여준 모습은 오직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계보는 형인 이스마엘이나 동생들이 아니라 이삭 본인에게만 전수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내려온 하나님의 약속이 이제는 자신의 아들 중 장자인 에서에게 이어져내려 가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묵상해 보겠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먹고 축복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에서에게 하는 말을 리브가가 들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에서가 들로 사냥을 하러 나가자 리브가는 야곱을 부릅니다.
리브가는 야곱에게 이삭이 한 말을 들려주고 야곱에게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줄 테니 그것을 가지고 에서인 척 이삭에게 가서 축복을 받으라고 합니다.
이삭이 에서를 좋아했다면 리브가는 야곱을 아꼈습니다.
야곱은 조금 걱정이 되었습니다. 에서와 자신은 외모적으로 차이가 많아서 들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만약 들키면 축복이 아닌 저주를 받을지도 모른다고 리브가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리브가는 그 저주는 자신이 받겠다고 하며 야곱에게 자신의 말을 따르라 했습니다.
그리고 계획대로 진행을 합니다. 새끼 염소로 음식을 만들고 염소 새끼의 가죽을 야곱의 손과 목에 입혔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이삭을 속이기에 충분히 변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가지고 이삭에게 나아갔고 이삭은 야곱의 손을 만지며 에서라 생각하고 음식을 먹은 후 야곱에게 축복을 합니다.
묵상해 볼 지점들이 많습니다. 그중 하나는 그 이삭의 축복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속이면서까지 얻으려고 했을까입니다.
이삭의 이 축복은 보통의 축복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앞에서 살펴봤습니다. 정말 의미 있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이 축복을 어쩌면 야곱이 당연히 받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거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샀던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렇지만 참 안타깝습니다.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축복이며 하나님의 믿음이 이어져내려 가는 축복입니다. 정말 값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얻어야 하겠지요. 귀한 것이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질문을 던집니다.
그 귀하고 값진 것을 왜 간계한 수단과 방법으로 차지하려 하는 것일까요? 마치 깨끗한 하얀 옷을 기름이 가득 묻은 두 손으로 받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기 쉬운 것이 이런 것 입니다. 목적이 좋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목적이 공공의 유익을 주는 것이기에 어떤 면에서 희생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목적이 좋으면 그 과정도 좋아야 합니다.
거짓과 속임소로 빼앗은 축복이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어쩌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려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야곱이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라도 해서 순리대로 흐르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조금은 있으나 그것도 아닙니다. 리브가나 이삭이 에서의 축복을 대신 받으려 했던 이유가 뭘까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축복이 돼지 목에 걸린 진주가 되어버릴까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의 가치에 합당하게 하겠다고 속이고 빼앗는 것이라면 그것 또한 돼지 목에 진주를 거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 일을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요?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을 하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물론,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내일 일을 알 수 없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하나님은 헛되게 쏟아버리시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에 기반해 옳지 않은 수단과 방법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바르고 정직한 자리에 그대로 머무는 것 입니다.
[축복을 쟁취하려는 손에 집중하느라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할 다리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묵상을 위한 질문]
1. 빼앗길까 봐 걱정했던 것들이 있습니까?
2. 그것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얻었습니까? 얻지 못했습니까? 그 방법과 결과는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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