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1:37-45]
37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38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39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40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41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42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43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44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이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하고
45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
요셉은 꿈을 해석하고 그 꿈에 대한 조언을 했습니다. 파라오와 모든 신하들은 요셉의 말을 좋게 여겼습니다.
파라오는 자신의 신하들에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파라오는 요셉에게 감동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조금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파라오가 하나님을 알았을까라는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파라오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집트에는 여러 신들을 믿는 신앙이 있었고, 파라오의 입장에서는 요셉이 믿는 신은 고대 근동의 다신론적 배경을 고려하면 신들 중에 하나라고 이해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기독교의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기독교가 신앙하는 신이라는 정도로 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파라오에게 요셉의 하나님은 많은 신들 중에 한 신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파라오는 자신이 잘 모르는 하나님이 아닌 눈앞에 있는 요셉을 주목했습니다. 요셉은 자신은 모르거나 믿지 않는 신을 믿는 사람이지만, 요셉을 보니 요셉은 하나님과 영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나 주위의 신하들을 생각해 봅니다. 그들도 각각의 신을 믿고 있었으나 요셉만큼 신과 이어진 사람은 없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요셉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파라오는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로 임명합니다. 그리고 요셉의 이집트식 이름을 지어줍니다.
‘사브낫바네아’ 즉, [צָפְנַת פַּעְנֵחַ(초프나트 파네아흐)]로 그 의미는 ‘신이 말하고 그는 살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쉽게도 파라오가 하나님을 믿은 것은 아니지만, 파라오는 요셉을 통해 요셉이 믿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신실하게 신앙하는 요셉에게 한 나라의 총리라는 직책을 맡깁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머물렀으면 하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기독교, 또 기독교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신뢰도가 점점 낮아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의 문제점들을 생각하기보다 다른 관점에서 이 질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신뢰도가 낮아진다는 것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또는 세상이 기독교에 대한 어떤 기대치, 신뢰에 대한 기대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치에 지금의 기독교가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75.4%에 이릅니다.
이 수치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어떤 시선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통계 뒷면에는 사회가 기독교에 대해 바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기독교가
- 윤리와 도덕 실천 운동
- 봉사 및 구제 활동
- 인권 등 사회 활동
- 환경 보호
- 학교 운영 등 교육 사업
등의 활동을 해야 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 윤리성과 도덕성 회복
- 삶의 태도와 윤리적 일관성
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그 믿음이 삶에 일관성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우리의 몸에 영향을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진짜 믿음은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관계이기에 눈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라오는 하나님을 모르지만 요셉을 통해 하나님이라는 신이 살아계시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을 믿는 삶의 태도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말하고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지가 곧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통로인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을 보고 실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말씀을 위한 묵상]
1. 그리스도인의 어떤 태도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을까요?
2. 내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세상에 증거하기 위해 변화되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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