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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커피계의 문익점 가브리엘 드 클리외

by 기대어 보기를 2023. 2. 15.

“이 씨앗은 기필코 살려내겠다!”

추위에 떨며 고생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목화씨 열 톨을 보며 문익점이 한 말이다. 원나라에서 목화씨 열 톨을 가지고 온 문익점은 그 씨앗을 심고 그중에 한 그루를 재배하는 데 성공했고 그 한그루로부터 300여 평의 목화밭을 만들어냈다.

 

목화계에 문익점이 있다면 커피의 세계에도 문익점과 같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가브리엘 드 클리외이다. 커피의 원산지는 에티오피아이다. 그것이 홍해 인근 지역 아라비아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점진적으로 열대지역으로 확산하였다. 그러나 커피가 다른 에티오피아와 아라비아 외에 다른 나라로 전해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 이유는 아라비아에서 커피를 음용하는 방법을 알고 많은 사람이 커피를 즐겨하면서 자연적으로 커피가 단순히 즐기는 음료가 아니라 상당한 경제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라비아인들은 커피를 다른 나라로 판매할 때 상당히 신중하게 했다. 살아있는 커피 생두를 반출하지 못하게 했고 커피 묘목 또한 철저하게 보호했다. 그래서 커피 생두의 경우는 물에 끓여버리거나 또는 완전히 건조해서 발아를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수출했다. 그런 까닭에 다른 지역에서는 커피를 가져왔으나 그것을 심어서 나무로 재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커피는 결국 몇몇 지역에 반출이 되기 시작했고 인도나 영국 등지에서 커피가 재배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커피가 조금씩 확산되던 시기에 프랑스도 자국에서 커피를 재배할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네덜란드의 식물원에 있던 커피 묘목을 구해와서 프랑스 파리의 식물원에 심었다. 그러나 커피나무는 성공적으로 자라지 못하고 매번 실패했다.

 

그러던 중 1714년 프랑스 정부와 네덜란드 지방 정부의 협정으로 1.5미터 정도의 커피나무 묘목이 루이 14세에게 보내졌고 그 묘목이 파리의 식물원에 심겨졌다. 그리고 그 커피나무가 훗날 프랑스의 식민지에서 재배되는 대부분의 커피나무의 시작점이 된다. 문익점이 가져온 10톨의 목화씨 중 재배에 성공한 한 그루의 목화와 같은 것이다.

 

마르티니크 섬 - Unsplash 의 Teddy Charti

파리의 식물원에서 성공적으로 재배된 커피나무는 이후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의 섬으로 보내지게 되는데 그중에 마르티니크라는 식민지에 커피나무를 가지고 간 사람이 커피계의 문익점이라 불릴만한 사람인 가브리엘 드 클리외(Gabriel Mathieu de CClieu)라는 군인이다. 그는 노르망디 출신의 해군 장교로 마르티니크섬의 주둔했던 보병부대의 대위였다.

 

그는 프랑스에 방문한 이후 프랑스에 있던 커피나무를 자신의 부대가 주둔해 있는 마르티니크섬으로 가져오고 싶었다. 그렇지만 커피 묘목을 구하는 것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커피 묘목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고 당시에 왕실 주치의였던 시라크라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커피 묘목을 구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커피 묘목을 구하게 된 또 다른 배경에는 고위층의 여성과 알 수 없는 은밀한 거래가 있었다고도 본다. 이 부분은 그의 편지에서 조금 알 수 있다.

 

그는 어렵게 커피나무를 구했고 그 묘목을 마르티니크섬으로 가져가야 하는데 그것 또한 매우 신중하고 은밀하게 해야만 했다. 그에 대한 기록을 보면 1723년에 프랑스 낭트에서 커피 묘목을 가지고 마르티니크섬으로 출항하는데 커피 묘목이 항해 중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커피 묘목을 유리로 된 상자로 덮어서 보호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커피나무가 항해하는 동안 충분히 햇빛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클리외는 배 위에서 커피나무의 수분이 마르지 않도록 해야 했는데 자신이 마실 물을 아껴가면서 커피나무에 물을 주었다고 한다.

 

커피나무가 마르티니크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여러 어려움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는 함께 배에 승선산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는 그가 유리 상자 안에 보호하고 있는 커피나무에 관해 관심을 보이며 커피나무를 훔쳐 가려고도 했고 어떤 승객은 커피나무를 시기해서 훼손시키려고도 했다. 또한 긴 항해에 불어닥친 기상악화로 인해 배 안에 파도가 들이쳐 매우 위태로운 순간도 있었다. 커피나무뿐만 아니라 승선한 모든 사람이 목숨을 잃을 뻔했다. 또한 배가 튀니지를 지나면서 해적을 만나기도 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커피나무를 지켜냈는데 긴 항해와 여러 어려움 속에 커피나무의 잎사귀가 마르고 시들기 시작했다. 당시에 그 배는 마르티니크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약 한 달 정도를 더 항해해야 하는데 커피나무가 시들면서 커피나무는 고사할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클리외는 그런 커피나무를 보며 가슴을 저미며 자신이 마셔야 할 물까지 커피나무에 부으며 커피가 시들지 않도록 지극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그의 지극정성 덕분에 커피나무는 죽지 않고 마르티니크섬에 도착했고 그 묘목은 프레쉐르라는 곳에 심겨지게 된다. 그렇게 심겨진 커피나무는 1726년 기쁨의 첫 수확을 이루게 되고 그 이후 커피나무는 엄청나게 번식해 나가게 되어 서인도제도와 멕시코만 인근 지역까지 보급하게 되고 결국 그 커피나무는 엄청난 경제적 부를 만들어냈다.

 

1686년 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 태어나 1705년 해군 소위로 임관한 그는 1760년까지 군인으로 복무했고 1774년 11월 30일 88세로 사망했다. 그의 커피에 대한 헌신은 시와 노래로 만들어졌고 왕실 지휘관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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