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창세기

[말씀묵상] 창세기 23:6 “아돈, 아도나이”

by 기대어 보기를 2026. 1. 29.

[창23:6]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합니다.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조금 놀라게 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우선 헷족속이 아브라함을 부른 명칭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한 가지 정리를 하자면 우리말 성경에는 사람들을 향해 부른 호칭을 ‘내 주여’라고 번역한 곳이 많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도 아브라함은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온 하나님을 향해 ‘내 주여’라고 했습니다. 물론 당시에 아브라함은 그들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내 주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말로 ’내 주여‘리고 번역된 부분들을 히브리어로 보면 조금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헷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부른 호칭은 ’내 주여‘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אָדוֹן(아돈)]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있습니다. 반면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나그네를 부른 호칭은 역시 ’내 주여‘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은 [אֲדֹנָי(아도나이)]입니다.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아돈은 단수 명사이고 세속적인 호칭이고 아도나이는 복수형태에 신성한 호칭입니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장엄 복수(하나의 존재가 가진 권위가 너무 커서 단수형으로 담아낼 수 없는 집합체의 표현)’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그 나그네를 하나님으로 보았던 것 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헷 족속은 아브라함을 존중하는 표현으로써 어른으로 부른 것 입니다. 다만 우리말 번역이 ‘내 주여’라고 된 것입니다. 

한 가지 묵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아도나이라는 호칭에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 세 사람을 향해서 아도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을까요?

아브라함은 그들이 하나님이신줄하나님이신 줄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오해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사람에게 ‘아도나이’라는 호칭을 썼을까? 아니면 아브라함은 그들이 하나님이신 줄 알았을까?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흥미롭고 설득력있는 시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당시에 분명 그들이 하나님인 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알다시피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후대에 모세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 입니다.것입니다. 그때에 모세는 아브라함이 당시에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신앙고백으로써 또는 신앙적 회고로써 아브라함은 그들을 ‘아도나이’라고 불렀음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서도 회고를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인 줄 알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난 이후에 하나님의 일하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때에는 그것이 은혜인 줄 몰랐으나 시간이 지난 이후에 그것이 은햬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어떤 특별함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아주 평범했습니까? 오늘 하루에 삶에 어떤 특별함을 발견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릅니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했는지 언젠가 알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마음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요? 오늘 하루도 하나님이 선물해주신 아주 특별한 하루였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걸어갔던 순간이 이었다는 마음가짐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있습니까?
2. 지나고 보니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