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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창세기

[말씀묵상] 창세기 25:19~26 “복중의 두 아이”

by 기대어 보기를 2026. 2. 7.

[창25:19-26]
19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0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21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22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4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리브가가 임신했습니다. 

쌍둥이를 잉태했습니다. 그런데 이 쌍둥이들이 태 속에서 서로 싸웠습니다. 

‘싸우다’라고 번역된 말의 히브리어는 [רָצַץ(라차츠)]라는 단어인데 산산조각 나거나 압박하거나 깨뜨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태아인 그들이 서로를 그렇게 산산조각내거나 압박했다는 의미보다는 에서와 야곱의 운명적인 대립과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한 문학적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쌍둥이의 경우 제한된 자궁 내 공간에서 생존을 위해 서로 물리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가운데 팔이나 다리를 내 뻗으며 찰 수 있고 그것을 산모는 강한 충격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리브가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리브가의 태중에 두 국민이 있다고 말합니다. 두 민족이 나뉘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큰 자가 어린자를 섬기겠다고 말 합니다. 

그리고 쌍둥이를 낳습니다. 먼저 나온 아이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에서라고 이름을 붙였고 나중에 나온 아이는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다고 해서 야곱이라고 했습니다. 

에서는 [עֵשָׂו(에사브)]라는 단어로 털이 많다는 의미이며 야곱은 [יַעֲקֹב(야아고프)]라는 단어로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의미인데 이는 움켜잡는 것 같지만 ‘밀어내다’의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도 출산할 때 태아가 손바닥에 자극을 받았을 때 손을 움켜쥐는 행위 ‘파악반사’를 하는데 이때의 힘은 자신의 몸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합니다. 야곱이 에서의 발뒷꿈치에 의해 손바닥에 자극을 받았을때 에서의 발목을 잡을 수 있습니다. 

짧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복선이 있는 이야기 입니다. 앞으로 이삭의 두 아들이 걷게 될 운명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다가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이삭의 가정 안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런 일을 만났을 때 이삭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이삭에게 아이가 없는 문제로 인해 기도했다기보다 아이를 잉태하지 못함으로 인해 아내 리브가를 위해 기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삭은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겠지만 성경은 리브가를 위해 기도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같은 내용의 기도라도 기도하는 사람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같은 기도라도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를 드릴 수도 있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삭의 기도는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린 기도라 보입니다. 

리브가도 태중의 아이들의 태동으로 인해 걱정이 되어 기도했습니다. 리브가의 기도는 하나님께 묻는 기도였습니다. 어떤 목적을 두고 이 현상이 해결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이와 같은 기도는 어려운 기도입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이나 목표, 결과를 정해놓고 드리는 기도는 비교적 명료합니다. 그러나 결과를 생각지 않고 이유를 묻는 기도는 들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기에 사실 어려운 기도 입니다. 

묻다는 말은 [דָּרַשׁ(다라쉬)]라는 단어입니다. 밟다, 묻다, 구하다, ~에 전념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묻는 것을 기도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도 기도라고 합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기독교 전통에서도 말씀묵상을 리브가가 하나님께 드린 묻는 기도로 봅니다. 유진 피터슨은 성경을 먹는 것으로 표현하면서 말씀 안으로 파고 들어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거룩한 읽기를 이야기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정직한 탐구라고 하여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기도라고 말합니다. 

성경의 텍스트가 없던 시대에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직접 음성으로 들려주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성령님은 음성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글로 기록되어 우리의 손에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의 고민들에 대한 길을 찾는 것이 바로 오늘 리브가가 드린 ‘다라쉬’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듣기 위해 기도 중에 무언가가 들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음의 귀를 기울일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그리고 천천히 읽으며 그 말씀 속에서 길을 찾아보려는 것도 기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묵상을 위한 질문]        
1. 지금 여러분은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를 드립니까 아니면 문제와 연결된 사람을 위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2. 지금 여러분이 드리는 기도를 목적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뜻을 묻는 기도로 바꾼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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