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5:12-26]
12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고
13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이름과 그 세대대로 이와 같으니라 이스마엘의 장자는 느바욧이요 그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14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15 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니
16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열두 지도자들이었더라
17 이스마엘은 향년이 백삼십칠 세에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고
18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
19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0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21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이스마엘은 느바욧, 게달, 앗브엘, 밉삽, 미스마, 두마, 맛사, 하닷, 데마, 여둘, 나비스, 게드마니까지 모두 12명의 자녀를 낳습니다. 이들을 12 지도자라고 합니다. 개역한글 성경에는 12 방백으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137세까지 살았습니다.
19절부터는 이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형제지만 표현이 다릅니다.
12절에서 이스마엘을 소개할 때에는 사라의 여종 하갈의 아들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갈이 아브라함에게서 낳은 아들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생물학적 아들인 것은 분명 하나 영적인 아들, 하나님의 언약의 계보가 이어지는 아들이 아님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반면 이삭에 대해서 기록할 때에는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명시하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명확하게 이스마엘과 이삭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삭은 40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의 관계처럼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 아이가 없었습니다. 리브가가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마치 사라와 같습니다.
참 아이러니합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인생을 함께 걸어오며 묵상하면서 느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하며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일들은 이상하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시겠다고 했고 그 자식은 이삭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었던 이삭이 아닌 경우에는 너무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을 통해 아이를 가지려 그토록 노력했으나 결국에는 포기하고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아이를 갖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하갈은 바로 아이를 가졌습니다.
또 아브라함이 노년에 맞이한 후처 그두라와의 사이에서도 무려 6명이나 되는 자녀를 낳았습니다. 하갈을 통해서거나 그두라를 통해서는 너무 쉽게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라를 통해서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라를 통해서 자녀를 낳는 것이었음에도 그것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결국 어렵게 어렵게 기다리다 기적처럼 낳은 이삭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도 했다가 이제 하나님의 섭리 속에 맞이한 아내 리브가와의 사이에서도 아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통로이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과정인데 왜 이렇게 술술 풀리지 않는 것일까요?
저는 제 자신을 돌아볼 때 조금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합니다. 저는 제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어떤 선물을 줄 때 그것을 그냥 툭 하고 던져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줄 수도 있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자녀가 부모가 주는 선물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줄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주지 않고 미뤄두기도 합니다. 적절한 순간, 어떤 감동을 줄 수 있는 순간, 간절함이 닿는 순간에 이전에 준비했던 그 선물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 자녀가 더 기뻐하고 더 감사할까요? 그건 미지수입니다. 다만 저의 입장에서는 그러고 싶은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당연히 이루어주실 일이지만 그것을 자연적인 결과로 주시지 않으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당사자인 우리는 기다림이라는 인내의 시간을 가지며 때로는 힘들기도 하지만 그렇게 얻은 것이라면 그것이 사실은 더 귀하고 소중하게 될 것입니다.
즉, 당연한 것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모든 것이 더 은혜가 되고 가치가 되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그런 존재이고 이삭에게 낳을 아들들이 그런 존재가 될 것 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끝나는 그 지점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시작되고 그것을 인식하게 되면 모든 것이 선물이며 은총임을 깨닫게 되는 것 입니다.
지연은 거절이 아니며 가치를 더 가치 있게 하는 시간이며 진실함 믿음과 성숙을 위한 시간이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냥 주시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묵상을 위한 질문]
1. 지금 여러분에게 지체된다고 느껴지는 것 중에 더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을 담아내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라 여겨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2. 빨리 이루어지는 성취와 오랜 기다림을 통해 얻는 것 중 우리의 영혼을 더 성숙시키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묵상 >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말씀묵상] 창세기 25:1~11 “노년의 아브라함 그리고 죽음” (0) | 2026.02.05 |
|---|---|
| [말씀묵상] 창세기 24:61~67 “묵상하다가” (0) | 2026.02.04 |
| [말씀묵상] 창세기 24:10~27 “응답의 이면” (0) | 2026.02.03 |
| [말씀묵상] 창세기 24:1~9 ”허벅지의 맹세“ (1) | 2026.02.02 |
| [말씀묵상] 창세기 23:7~20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되었다라” (0) | 2026.01.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