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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창세기

[말씀묵상] 창세기 30:1~8 “라헬의 선택”

by 기대어 보기를 2026. 3. 3.

[창30:1-8]
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2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3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4 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5 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6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7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8 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라헬은 언니 레아가 4명의 아들을 낳기까지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 현실은 라헬에게 심적으로 상당한 스트레스였습니다. 동시에 언니 레아에 대한 시기하는 마음이 들끓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말합니다.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라헬의 스트레스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바빌로니아의 탈무드 네다림에 보면 살아있으나 죽은 자와 같은 4가지 부류가 나옵니다. 그중에 하나가 ‘자녀가 없는 자’입니다.

라헬은 자녀가 없으니 자신은 죽은 자와 같다는 심경을 야곱에게 토로합니다. 그런데 의문이 듭니다. 야곱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야곱은 이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화를 내며 말합니다.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야곱은 라헬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라헬의 태를 닫으셨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라헬은 답답해서 야곱에게 이야기했고 야곱은 화가 나서 라헬에게 큰소리로 말합니다. 부부싸움의 한 장면입니다. 답답하고 속상하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 앞에 부부가 서로 울분을 쏟아내며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이 둘의 다툼에 ‘하나님’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 부부가 싸우고 있는, 바로 우리의 현실적인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듣는 삶의 덕목은 사랑하고 섬기고 나누는 등의 아름다운 가치입니다. 그런 말씀 앞에서는 다툼도 없고 상처 주고 상처받을 일도 없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저를 포함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가정에서 다투고 성내고 때론 상처를 주는 말을 합니다. 어떤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의 메시지와 현실의 삶은 역시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괴리감이 있지만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라헬과 같은 마음을 갖거나 야곱과 같은 감정이 올라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라헬이나 야곱처럼 문제 앞에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마치 믿음 없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의 모양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라헬과 야곱이 보여준 이 장막 안에서의 대화와 다툼은 그런 우리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 같아 친숙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아쉽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여 우리가 완벽한 인생과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면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의 차이가 없는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이 대화를 보면 서로를 향해 불편한 감정이 드러났지만, 이 대화 속에 해결책이 보입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야곱은 문제의 원인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라헬의 태를 닫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29장에 레아는 어떠했습니까? 레아는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때 레아가 선택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으며 맡기며 살아가는 것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다듬어지지 못한 인격이나 태도는 성격이나 삶의 방식이 나와 다른 누군가와 함께 맞춰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아 늘 삐걱이고 다툴 수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는 것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라헬이 야곱에게 ”내게 아들을 낳게 하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요? 혹시 야곱이 믿는 하나님께 기도해달라는 의미는 아니었을까요? 물론, 이것은 추측일 뿐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닫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실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레아처럼 기도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라헬이나 야곱이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헬은 그러지 못했고 지금의 야곱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해야 할 것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하니 결국 다른 방법,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래서 라헬은 제안합니다. 자신의 첩 빌하를 통해 아이를 낳으라고 합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자신이 아이를 갖지 못하니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으라는 것과 같은 방식을 선택합니다. 

라헬의 이 결정의 이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언니 레아에 대한 시기심, 그리고 재산이나 상속 문제 등입니다. 그러니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것입니다. 3절에 라헬은 빌하가 낳은 아이를 자신의 무릎에 두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고대 근동의 ‘누지 문서’에 나오는 법적인 입양 절차를 의미합니다. 즉, 라헬은 빌하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라헬의 아이디어대로 야곱은 빌하를 통해 아들을 낳습니다. 

첫째 아들은 ‘단’입니다. 단은 [דָּן(단)]으로 의미는 ‘재판관’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이름을 붙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억울함을 푸시려고 자신의 호소를 들으사 아들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납달리’라 지었습니다. [נַפְתָּלִי(납달리)] 즉, 씨름, 다툼이라는 의미입니다. 라헬은 자신이 언니인 레아와 다투어서 이겼다는 의미로 이 이름을 지었습니다. 

라헬은 레아와 비교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아들들의 이름을 단이나 납달리로 지은 것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라헬의 태를 닫았습니다. 그래서 라헬은 자신의 여종인 빌하를 통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준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라헬의 억울함을 들으셨다면 라헬을 통해 아이를 낳게 해주시지 않았을까요?

많은 그리스도인이 쉽게 빠지는 착각입니다. ‘내가복음’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단은 그렇다 쳐도 납달리라는 이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은혜를 찾는 사람의 생각의 밑바탕에는 경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시기해서 경쟁한 자신을 도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찾는 것이 아닌 자신의 판단과 생각대로 일을 처리하고 그 결과가 좋으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믿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누군가를 시기하여 경쟁하고 있는 자신을 승리하게 한 것이라 또 믿어버립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시지 않으시고 그저 지켜보시기만 하셨을 것이기에 라헬의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라헬과 같은 상황이라면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했을까요?
2. 야곱처럼 화가 난 상황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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