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6:13-22]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15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16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20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21 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하나님은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 그리고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불편합니다. 우리는 그저 끝까지 사랑의 하나님으로 우리 곁에 계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 심판에 제도 벗어날 수 없다 한다 하여도 공감이 됩니다.
앞 묵상에서 부패한 세상에 대해서 묵상을 했었습니다. 부패한 음식은 역겹고 괴롭습니다. 그런 음식은 토해내야 하고 모두 쓸어 담아 버려야 합니다. 세상이 그와 같다면 얼마나 괴로울까요?
우리는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축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처럼 모든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세상에 추악함에 절망해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보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세상은 하나님께 실망스럽다거나 아쉬운 정도가 아닙니다.
온정의 정의롭고 공의로우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그런 세상을 어떤 것일까요? 구약성경에 흐르는 정함과 부정함의 관계를 보아도 거룩함과 부정함이 접촉하면 부정함은 소멸되어 버립니다. 마치 빛이 나타나면 어둠이 소멸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죄악이 관영하고 부패한 세상을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심판 중에도 모세는 은혜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고페르 나무로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고페르 나무[גֹּפֶר(고페르)]는 잣나무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나무 입니다. 20~30미터 높이고 곧게 자라는 나무 특성때문에 건축에 사용되는 나무 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고페르나무는 ‘유숙하다’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방주는[תֵּבָה(테바)]외래어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이는 히브리어인데 그 의미는 ’궤‘입니다. ‘상자’라는 말이 더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 궤는 구약성경에 중요한 유비로 사용됩니다. 노아의 가족의 생명을 구하는 상자로부터 시작해 모세를 살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장소, 언약이 담긴 장소의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 방주의 크기는 한 규빗 즉,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를 기준으로 약 45~52cm로 했을 때
- 길이 삼백규빗 : 135m
- 너비 오십규빗 : 22.5m
- 높이 30규빗 : 14m
의 3층으로 구성된 커다란 나무 상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세상의 모든 동물들을 다스리라고 하셨던 것처럼 노아에게 혈육 있는 생물들을 각기 그 종류대로
-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 씩
- 부정한 짐승은 암수 둘 씩
-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 씩
방주에 태우도록 합니다.
그리고 노아의 가족이 먹을 양식도 방주에 채우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준행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의문점이 많은 말씀입니다.
- 어떻게 저렇게 큰 방주를 노아가 만들 수 있었을까?
- 저 방주를 건조할 기술을 가지고 있었을까?
- 저 방주 안에는 펭귄도 탔을까?
이러한 궁금증들은 여전히 상상력과 궁금증으로 남겨두어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세상은 심판을 받으시나 하나님은 여전히 창조세계를 사랑하셔서 구원의 방주를 두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시대에 있었던 일이지만 심판 속의 구원인 방주는 진행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구원의 방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도 역시 진행형입니다. 우리는 우주적인 종말의 시간과 개인적인 종말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라는 구원의 방주가 필요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노아의 때와 같이 구원의 방주에 태워야 할 사람이 있습니까? 그들은 누구입니까?
2. 노아는 방주를 만들라는 말에 순종했습니다. 우가 노아처럼 방주를 만든다면 그것은 무엇을 행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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