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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에베소서

에베소서 2:1~5 a

by 기대어 보기를 2025. 7. 15.

[엡2:1-5]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바울은 말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이 문장에서 ‘그’는 ‘하나님’이고 ‘너희’는 ‘헬라인’들입니다. 3절에는 ‘우리’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유대인’입니다.

바울은 헬라인과 유대인을 구분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차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좀 더 잘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1절은 원문의 의미를 직역한 것이 아닙니다. 원문에는 ‘살리셨도다’는 문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한글 번역성경을 보면 공통적으로 ‘죽었던 혹은 죽은 사람들입니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살리셨도다는 말이 첨가된 개역개정 번역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1절의 문장은 동사가 생략되어 있어서 보충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5절에 [συζωοποιέω(쉬조오포이에오) 같이 살아있게하다]라는 동사로 보충한 것입니다. 

1절의 메시지는 너희 즉, 헬라인 그리고 같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으로써 우리들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즉,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허물[παράπτωμα(파라프토마)] 이란? [παραπίπτω(파라핍토)]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파라핍토는
- 곁에서 떨어지다.
- 진리나 정도에서 벗어나다, 길을 잃다.
- 실수나 잘못, 오해나 실책을 하다.
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허물이란 벗어남이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죄’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란 [ἁμαρτία(하마르티아)]라는 명사로 '과녁을 맞추지 못하다'는 의미의 [ἁμαρτάνω(하마르타노)]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인간적인 의 나 신적인 의 에서 떠난 모든 행위 자체를 말합니다. 

두 단어가 모두 무언가에서 벗어난, 길에서 벗어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보편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회의 규약이나 버, 도덕, 윤리에 반하는 어떤 행위들을 허물 또는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해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 길이며, 무엇이 정도이고 무엇이 과녁이냐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어쩌면 신앙인의 시각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분기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다양성의 가치가 중요한 오늘 이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진 도덕과 윤리의 가치관은 문화유산입니다. 인류가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쌓아온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위에 세워진 사회적인 규약이거나 윤리와 도덕, 양심의 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은 문화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문화에서는 불편하고 죄라고 여겨지는 것이 다른 문화에서는 죄라고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서구 문화권에서 상대방의 눈을 마주하는 것은 자신감이나 정직함의 표현이지만 한국등 동양권에서는 눈을 피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예의이며 눈을 마주 보는 것은 무례하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런 차이는 종교적인 차이에서 아주 많이 등장합니다. 오늘날에도 첨예하게 대립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동성애, 낙태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허물과 죄란 매우 종교적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가 기준이고 하나님의 의가 과녁입니다. 거기에서 벗어나거나 빗나간 우리의 모든 해위는 허물이며 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선을 행하고 살아가거나 악을 행하고 살아가는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선함과 악함의 기준이 다릅니다. 그래서 전혀 죄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도 죄가 되기도 합니다. 

종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어느 정도 금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정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향락이나 인간적인 욕구를 절제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너무 많고 모든 것이 다 구체적이라서 이렇게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돌밭에서 돌을 골라낸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처음에 눈에 보이는 돌은 매우 클 것입니다. 발에 걸려 넘어질 정도의 돌들을 골라내면 그 다음에는 그것보다 조금 작은 돌맹이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들을 다 골라내어도 여러분들은 그보다 작은 돌맹이들을 보게 될 것 입니다. 아마 우리는 끝도없이 손톱만한 돌맹이들을 계속해서 골라내게 될 것 입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돌무덤 위에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νεκρός(네크로스)] 즉, 죽었습니다. 죽은 자였습니다. 

저는 죄에 함몰되는 감정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오늘은 날카롭게 우리의 삶을 성찰해 보면 어떨까요? 내 삶의 밖으로 던져버려야 할 죄라는 돌멩이를 찾아 보면 어떨까요?



    
[묵상을 위한 질문]                
1. 여러분의 하루라는 시간은 어떻게 사용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2. 여러분의 재능은 무엇이며 그 재능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3. 나의 만족과 하나님의 만족이 공통분모를 이룰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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