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4:1-3]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사랑이라는 단어 있는 몇 가지 이름들을 묵상했습니다. 그것은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입니다. 그리고 ‘자비’라고 번역하면 좋은 사랑의 이름입니다. 이들이 함께 모이면 ‘서로 용납함’을 이루어 냅니다.
용납함이란 [ἀνέχομαι(아네코마이)] 라는 단어로 참다, 견디다, 용서하다는 의미입니다. 참고 견디는 것 용서하는 것은 한때 미덕이라고 여겨졌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와 문화 속에는 위계질서나 어떤 권위의식 속에 강요된 참음과 견딤과 용서가 요구되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이 시대에도 참고 견디고 용서하는 것은 여전히 미덕이라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 시대에는 참을성이 없고 견디는 것을 힘들어하고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수많은 갈등을 엮고 있고 분열과 단절 속으로 들어갑니다. 도무지 용납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끄럽지만 그런 모습에 교회도 한 몫을 한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익숙합니다. 이를테면 교회와 세상,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선과 의, 신앙과 불신,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과 같은 등식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이런 관계를 분별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 입니다. 거룩함이란 [ἁγιάζω(하기아조)] 라는 단어로 ‘구별하는 것’ 이라는 의미로 거룩함과 부정함을 구별하는 의미입니다. 아마 이 단어의 의미를 알지 못했더라도 우리는 거룩함이 연상되는 어떤 것들을 구별하여 그런 모습을 갖추는 것을 거룩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분법적인 생각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착각하기 쉽습니다. 맞거나 틀리거나 옳거나 잘못되거나와 같은 판단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 생각, 내 경험, 내 신념, 내 지식, 내 신앙이 기준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나와 다른 생각을 불편해합니다. 참아내지 못하고 견디지 못합니다. 용서는 더더욱 힘든 것이라서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앞의 네 가지 입니다.
내가 좀 더 겸손해지고
내가 좀 더 온유해지고
내가 좀 더 오래 참을 수 있고
내가 좀 더 자비로워진다면
우리는 좀 더 나와 생각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을 용납함 즉, 참고 견디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이란 평안을 우리에게 묶어내는 줄을 의미합니다. 줄이란 쓰임세가 많은 원시적인 도구이며 인류 역사에서 그 용도는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줄로써 무언가를 붙잡고 결속하고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행하시는 일 중에 하나는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 분열과 연합을 상징하는 두 개의 큰 사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바벨탑 사건입니다.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시날 평지에서 성읍과 탑을 건설합니다. 특히 탑을 쌓아 올리는데 하늘에 닿게 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온 세상에 내고 흩어지지 말자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높은 탑을 쌓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신념과 생각과 능력으로 하나님이 계신 하늘까지 쌓아 올리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것은 교만의 탑을 쌓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 일의 결국은 사람들의 언어가 혼잡하게 되어 소통이 단절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탑을 쌓아 올리지 못하고 흩어져 버립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하나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오순절날에 예수님을 믿고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던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때에 성령이 그들 가운데 임했는데 그곳의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방언’이라 불리는 것이었고 그때의 방언은 다른 언어 즉, 외국어였습니다. 바대, 메데, 엘람, 메소보다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 구레네, 이비야 지방의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는 각기 다른 언어로 사람들이 말을 했는데 외국어를 말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평소에 소통할 수 없는 사람에게 말이 전달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없이 자신들의 생각과 신념으로 충만했던 바벨에서는 언어가 흩어졌지만 성령의 임재 속에서는 각기 다른 언어가 서로 들리는 일이 일어난 것 입니다.
이 사건이 아니더라도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은 성경 전체에서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에베소서 2장도 그 하나 됨, 연합함의 이야기로 충만하고 그 모든 연합함은 성령님의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 안에 위의 사랑의 이름들도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갈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말씀 그대로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묵상을 위한 질문
1. 소통이 단절되어 어려운 관계가 있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소통과 연합을 위해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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