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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에베소서

에베소서 6:5~9 a

by 기대어 보기를 2025. 9. 22.

[엡6:5-9]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이 본문은 오늘 이 시대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먼저 한 개인의 존엄성과 인격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종'과 '상전'이라는 말은 상당히 불편한 단어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종과 상전'처럼 신분의 차이가 있고 그에 따른 '차별'이 있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종들은 상전을 두려워하고 떨면서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하라고 하는데 이 또한 받아들이기 쉬운 관계의 표현은 아닙니다.

또 생각하건대 오히려 기독교 안에서는 이와 같은 메시지는 부정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종들과 육체의 상전의 관계는 타파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전반부에서 나왔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의 허물이 없어지고 멀리 있던 사람과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 가까워졌듯이 예수님 십자가 안에서는 종과 상전의 구분이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오히려 사람 위에 사람이 없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한 형제가 되고 한 자매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에베소서 후반부의 말씀은 표현들이 사실은 그대로 수용하기에 조금은 반발심이 생기는 것이 많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을 해야 하고 자녀는 부모의 말에 순종해야 하고 종들은 상전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내용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을 읽을 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혹시 종들과 상전의 관계에서 어쩌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주종 관계, 갑을 관계에 대한 말씀으로 들어야 할까요?

가령 을은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갑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는 말씀일까요?

먼저, 우리는 에베소서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배경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쓰인 시대는 남녀의 인격적인 차별이 심했고 사회 제도적으로 노예라는 계층이 존재했던 시대입니다. 오늘 우리시대의 관점으로 참 불행했던 시대 입니다.

그런 시대적인 배경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그런 시대의 차별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층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왕과 신하, 주인과 노예, 남편과 아내의 사회적인 지위의 차이는 분명하게 있지만 그렇다고 어떤 사람은 노예가 되어 인생을 착취당하고, 여성은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과 같은 메시지는 어떤 의미일까요? 왜 이런 듣기불편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런 말씀을 만날 때 그 말씀이 입고 있는 문화라는 배경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 문화의 겉모습을 벗겨버립니다. 그러면 그 안에 담긴 문화적인 차이와 시대적인 차이를 넘어서는 본래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조금은 현대적이고 또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기본적인 입장에 더 부합하는 의미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노예와 주인이라는 정말 부당한 제도의 껍질을 벗겨 버리겠습니다. 그렇다면 계급이나 신분이 아닌 의미로써 주인과 종의 관계가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관계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든지 존재해 왔습니다.

오늘날에도 또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 사이에도 그런 관계는 여전히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에베소서를 기록한 바울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교회에 편지를 쓸 때 종종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종'과 같은 단어입니다. 또 오늘날에도 목회자를 '주의 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부른 것은 실제로 바울이 '노예'의 신분을 얻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런 존재, 그런 위치가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노예와 주인이라는 제도는 없지만 우리가 흔히 '갑을 관계'라고 하는 관계는 이 세계에도 존재합니다. 어떤 계약이나 어떤 법적인 효력을 지닌 관계도 여전히 존재 합니다. 그리고 그런 계약이나 법적인 효력이 없는 관계라 할지라도 스스로 자신을 '종'과 같은 위치에 놓는 사람도 있고 또 '주인'처럼 섬김을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은 노예와 주인이라는 사회적인 제도에서의 특정한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섬겨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과 섬김을 받거나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의 위치로 접근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섬기려는 자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섬겨야 할 자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1) 섬기는 사람은 두려운 마음과 떨리는 마음으로 순종하라
2) 눈가림으로 하지 말라
3)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라
4) 사람들이 하는 섬김을 하지 마라

오늘은 이 지점까지 묵상해 보겠습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는 말씀에 불편한 지점이 있으셨습니까? 

그 불편함은 무엇입니까? 보편적인 인권의 관점에서 불편했습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은 종은 아니지만 어떤 경우에 종과 동일시되어 상전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지점이 불편하셨습니까?

두 가지다 누구나 달갑지 않은 지점은 맞습니다. 우리는 섬김을 받는 입장이 되고 싶고 높은 지위를 가진 위치에 오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섬기려는 자와 섬김을 받는 자라는 언어로 바꾸어내면 그 불편한 지점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오히려 우리 자신의 삶의 태도를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섬기는 것에 익숙합니까? 섬김을 받는 것에 익숙합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위치에 머물기를 원하실까요?




묵상을 위한 질문
1. 여러분들이 순종해야 할 상전이라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2. 섬기려는 자의 마음과 태도로 누군가를 섬겨본 일은 무엇입니까?
3. 여러분이 섬기려는 자의 태도로 섬겨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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