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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골로새서

골로새서 3:11

by 기대어 보기를 2025. 5. 30.

[골3: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일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에 차별이 없습니다. 즉, 누구나 새 사람을 입을 수 있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있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사실 이것은 당시에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니요 당시에도 당연한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당시에는 차별이 있었습니다. 나라와 인종, 혈통에 따른 차별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이냐 아니냐의 구분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민족들을 ‘이방인’으로 구분했습니다. 심지어 ‘사마리아인’처럼 자신들과 같은 민족이었으나 역사적으로 이방인과 섞여 버린 사람들은 사람으로서의 존엄마저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할례를 받은 사람이냐 아니냐도 구분의 대상이었습니다. 육체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은 어떤 신앙의 우월감이나 자부심을 가지기도 했고 할례를 받지 않은 다른 민족에게는 성인에게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일종의 강요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을 읽어 보면 이와 같은 문제 때문에 예루살렘교회에서 이 문제에 대한 회의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언어의 문제로 구분했습니다. 야만인 *βάρβαρος(바르바로스)* 라는 단어는 외국말을 하는 이상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는 의미의 형용사입니다. ‘바르바로스’라는 말의 의미도 그 외국말이 그런 발음으로 들린다는 의미로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쏼롸쏼라’로 외국발음을 이야기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스 구디아인 같은 경우는 유목민족으로 흑해 북쪽에 살던 민족으로 가장 야만적인 사람을 상징합니다.   
  
문명적인 편견과 차별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아도 1492년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로 서구 기독교인과 인디언의 접촉이 있었는데 그때에도 인디언을 ‘야만인’으로 구분했고 심지어 ‘영혼이 없는 존재’들로 간주하기도 했었습니다.   
  
또 종이나 자유인과 같은 신불의 차별도 있었습니다. 자유인에게는 그 말이 의미하는 사회적인 자유가 보장되어 있어서 종교적인 자유도 보장이 되었지만 종의 경우는 주인의 의지에 따라 그것이 달라지게 됩니다. 이를테면 어떤 주인들은 종들에게 종교를 가질 자유를 주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어떤 체제에서는 억압하고 통제하는 수단이 종교를 갖지 못하게 하거나 종교를 강요하는 방법으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데에 차이가 있었고 구분을 했었고 차별을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구분이나 차이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차별의 문제였습니다.   
  
유대인들만 해도 자신들 외에는 이방인으로 치부했지만 사실 그들이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제대로였다면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열려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라합’이나 ‘룻’과 같은 이방인 여성이 들어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차별이 아니라 모든 차별의 장벽을 넘어서게 합니다. 우리 나라의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 그런 모습들이 잘 드러납니다.   
  
우리나라도 양반과 노비와 같은 신분의 차별이 있었고 여성과 남성의 성차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신이 들어오면서 교회 안에서 그와 같은 차별을 극복하고 여성에 대한 교육적기회와 더불어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는 길들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 즉, 모든 것 이십니다.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이것은 인종이나 신분이나 어떤 차별의 문턱을 다 뛰어 넘어서 누구에게든지 계시는 분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언듭된 차별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인종, 종교, 사회, 문화, 신분, 정치, 이념, 지연, 학연, 부의차이, 음식, 성, 적대적 관계,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혹은 찍은 사람들 등… 사실 이 물음은 예민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할래?”라고 묻고 있습니다.   
  
또 다른 물음도 있습니다. 차별이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기득권도 없다는 것 입니다. 신앙생활 잘 해오셨습니까? 기독교가정에서 성장하셨습니까? 오랜 교회 공동체의 문화적 토양 속에서 성장하셨습니까? 스스로의 삶이, 성장 배경이, 사회적인 관계망이 괜찮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여러분의 일대 일의 관계일 뿐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들.                                                                
1. 오늘의 교회 공동체가 밀어내고 있는 혹은 경계석을 쌓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2. 여러분이 수용하거나 포용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예수님께 여러분은 포용되기 쉬운 사람입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을 포용하기 위해 어떤 것을 참으시고 견디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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