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9:17-22]
17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18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19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20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 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21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두 천사는 롯과 그의 아내 그리고 두 딸을 밖으로 이끌어내었습니다.
그들에게 당부합니다.
”어서 피하여 목숨을 건지시오. 뒤를 돌아보거나, 들어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저 산으로 도피하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고 말 것이오“(새번역)
롯이 밖에 나가 도피할 산을 바라보니 거리가 꽤 멀었던 것 같습니다. 롯의 생각에는 천사가 말하는 산까지 갈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롯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다른 길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두 분께서는 이 종을 좋게 보시고, 저에게 크나큰 은혜를 베푸셔서, 저의 목숨을 구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저 산까지 도피해 가다가는 이 재난을 피하지 못하고, 죽게 될까 두렵습니다. 보십시오. 저기 작은 성이 하나 있습니다. 저 성이면 가까워서 피할 만합니다. 그러니, 그리로 피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주 작은 성이 아닙니까? 거기로 가면, 제 목숨이 안전할 것 입니다.“(새번역)
롯은 천사들이 말한 산까지 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안전한 장소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롯의 눈에 가볼 만한 마을이 하나 있었습니다.
소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소알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롯은 그곳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롯의 간청에는 그 성읍은 비교적 가깝고 또 작은 곳이기 때문에 그리로 피하면 그곳에는 재앙을 내리지 말아 달라는 의미였습니다.
두 천사는 롯의 간청을 들었습니다.
“좋소, 내가 그 청을 들어주겠소. 저 성은 멸하지 않겠소.”
말씀을 보니 이외의 결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렇지만 롯의 모습은 신앙적인 관점으로 조금 부족해 보이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천사가 롯에게 재앙이 내릴 것이라는 말을 했을 때에도 탈출 직전에 롯은 지체했었습니다. 그리고 산까지 뒤돌아 보지도 말고 도망하라 했을 때에도 롯은 거기까지 가기에는 너무 힘들고 가다가 죽을 것 같다는 두려움을 토로합니다. 어떤 면에서 어른스럽지 못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만들어낸 결과는 대단했습니다. 롯의 간청에 소알이 심판을 당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롯이 한 마을을 멸망에서 건진 것 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머리가 조금 복잡해집니다. 이걸 어떻게 봐야 할까요?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잡게 된 격이라고 봐야 할까요? 롯이 그래도 아브라함과 비교해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의인이었고 그래서 롯의 간청을 하나님이 들어주셨던 걸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롯의 신앙이나 오늘 롯의 간청을 좋은 의도로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앞에서 롯이 자신의 딸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적지 않게 놀랐고 실망했고 지금도 하나님이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었는데도 거기까지도 갈 수 없다고 때를 쓰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롯 때문에 소알이 구원을 받았다거나, 롯이 그래도 의인이어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있다는 방식으로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럼 오늘 이것을 어떻게 볼까요?
말씀을 조금 더 읽으면 흥미로운 부분이 나옵니다.
[창19: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29절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성경책을 보시면 성경책에는 몇 가지 표식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성경구절 사이에 동그라미가 새겨진 것이 있습니다. 성경책 출판사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어떤 원은 색으로 채워져 있거나 어떤 원은 빈 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 표식이 있습니다.
이 표식의 의미는 하나의 새로운 문단이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성경을 보시면 창세기 19장 28절까지 한 문단이 끝나고 29절이 새로운 문단이 시작되는 것이라는 표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30절은 또 새로운 문단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마치 29절 한 문장이 하나의 독립된 문단이라 표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성경이 장과 절은 인위적으로 보기에 편하도록 후대에 추가된 구분입니다. 그러나 문단의 표식 즉, 문단을 구분하는 것은 그 내용에 따라 나뉘었습니다. 말하는 주체가 바뀌거나 사건이 전환되거나 하나의 주제나 의미가 달라질 때마다 그것을 문단으로 나눈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정도 성겨의 내용을 해석함의 결과로 나온 것 입니다.
그래서 성경마다 이 문단 구분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성경번역의 차이에서 그렇게 됩니다. 해석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관점이 되기도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29절 말씀은 갑자기 롯의 이야기에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끼어들어간 것처럼 보입니다. 단 한절로 한 단락인 것 입니다.
그런데 29절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창19: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우리는 아브라함이 소돔의 롯을 위해 간청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기도와 간청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롯이 소알을 구했다기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간구로 롯을 구원하신 것이고 롯이 소알로 피했기에 소알이 심판을 면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아브라함의 간구였습니다. 그러나 롯이 아무런 공로도 없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비록 미성숙한 신앙의 모습이었으나 그에게 구원의 은혜가 있었고 그의 말이나 행동은 미숙하나 그가 소알로 들어갔기에 롯 때문에 소알이 심판을 면한 것도 사실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을 비교하면 롯은 한참 부족해 보입니다. 반면에 아브라함과 제 자신을 비교해 보면 어떨까요? 롯이나 저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롯이 들어갔던 소알이 심판을 면했다면 아직도 부족하다 여겨지는 우리가 신앙인으로 이 땅에서 살고 있다면 그것 하나로도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는 통로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직 부족하고 미성숙한 신앙의 모습이라도 우리는 잘 살아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다 순종을 못한다 하더라도 할 수 있는 만큼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비록 부족하더라도 은혜의 통로가 되어 살아가고 싶습니다.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God writes straight with crooked line
하나님은 굽은 선으로도 곧은 글을 쓰신다.
우리는 굽은 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살아가는 삶을 통해 곧은 선 구원과 생명을 만들어가시는 분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이웃이나 가족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떤 이유였습니까?
2. 여러분을 통해 누군가 따뜻해지는 마음을 경험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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