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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창세기

[말씀묵상] 창세기 19:30~38 “동굴안의 소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by 기대어 보기를 2026. 1. 7.

[창19:30-38]
30 롯이 소알에 거주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가 거주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주하였더니
31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
32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33 그 밤에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34 이튿날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제 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 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35 그 밤에도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36 롯의 두 딸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임신하고
37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의 조상이요
38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자손의 조상이었더라




롯의 이야기는 불편한 지점이 많습니다. 그중에 가장 불편한 지점이 오늘 말씀입니다. 

롯이 소알로 도망갔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불과 유황으로 완전히 멸망당했습니다. 그 풍경은 어쩌면 세상에 종말이 온듯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 일 이후 롯은 소알에 거주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 이유는 알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소돔과 가까워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멸하시는 그 모습에 소알도 어쩌면 멸망당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천사들이 처음 롯에게 도망가라고 했던 곳은 소알이 아니라 산이었습니다. 그러나 롯의 간청으로 소알로 피하였고 소알에는 심판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롯은 어쩌면 그곳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두려움으로 소알로 도망가겠다고 간청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두 천사가 도망가라고 했던 산으로 다시 가야겠다고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롯은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갔습니다. 산에 있는 굴에 들어가 거주했습니다. 

우리나라의 환경을 생각하면 산에 있는 굴에 들어가는 것은 잘 상상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지만 굴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의 배경이 되는 오늘날 사해 근처의  지리적 환경을 보면 거대한 기암바위들이 산으로 형성되어 있고 사람이 지낼만한 굴들이 많습니다. 그런 까닭에 다윗도 사울왕의 군대를 피해 숨어 다닐 수 있었습니다. 

롯은 두 딸과 함께 산에 가서 굴에 들어가 거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이어지는 일은 말씀을 읽으며 두 눈의 의심하게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근친상간’이라는 방법을 통해 롯의 대를 잇고자 하는 두 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리고 실제로 두 딸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아이를 갖게 되고 큰 딸이 낳은 아이는 ‘모압’으로 오늘날 모압의 조상이 되고 작은 딸은 ‘벤암미’를 낳고 오늘날 암몬 자손의 조상이 됩니다. 

이 이야기는 정말 불편합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꽤 불편합니다. 

그렇다면 롯의 두 딸들은 왜 그런 판단을 했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묵상해 보겠습니다. 

먼저 말씀을 읽으면서 발견할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31절입니다. 

[창19:31]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

큰 딸이 작은 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늙으셨다” 이 말은 이런 의미들이 있습니다. 고대근동의 사회에서 ‘가문’을 이어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정서가 있습니다. 

롯의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롯의 아들이나 손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롯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롯의 아내도 소금의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롯이 새로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기도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즉, 지금의 현 상황으로는 롯의 가문을 이어갈 후손이 없는 것입니다. 

한 가지 가능성이라면 롯의 두 딸이 아이를 낳는 것인데 이 부분에서도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베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

두 딸은 베필이 될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결혼하기로 했던 남자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기고 소돔에 남아 있다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소알은 멸망당하지 않았고 그곳에도 남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을 말하는 히브리어는 [אֶרֶץ(에레츠)]이고 동일 본문의 다른 말로 ‘세상’으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즉, 그녀가 말한 이 땅은 소알에 국한되지 않은 온 땅을 말하는 것 입니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도시들이 다 멸망을 당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방법이지만 아버지를 통해 자녀를 낳는 것이 종족 보존을 위한 필사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유대교 랍비들은 ‘죄’와 ’동기‘ 사이에서의 균형을 맞춰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매우 복합적입니다. 이 내용 안에는 여전히 생각할 지점들이 있습니다. 

먼저, 이것은 비극입니다. 평화로운 일상이었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습니다. 특수한 상황 속에 심리적인 두려움과 가문의 유지라는 어떤 사명감 속에서 자행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비극입니다. 이것에는 잘했다 못했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분명 죄의 문제입니다. 당시의 롯의 두 딸의 정신적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대가 끊긴다는 가문종속에 대한 책임이 이런 결정을 하게 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죄의 관점으로 본다면 분별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돌아보면 아브라함도 롯처럼은 아니지만 비슷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었지만 당시의 상황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낀 사라는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을 낳게 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아들 이삭을 낳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넘어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롯의 가정에 그와 같은 믿음이 있었다면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롯의 생명을 보존할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롯의 가문도 이어질 길들이 열릴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믿는 믿음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있다면 두 딸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은 우리에게 분별력을 줍니다. 죄가 아닌 선하고 바른 선택을 하게 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놀라운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롯과 두 딸 사이에 불편한 일이 있었고 그 결과로 모압과 암몬 족속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성경에 롯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룻’입니다. 이 룻은 롯과 큰 딸 사이에 태어난 아이 ‘모압’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놀랍게도 모압의 후손이지만 보아스와 결혼을 해서 다윗의 조상이 됩니다.

[마1:5-6]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롯과 두 딸의 일은 세상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거룩함을 지키지 못한 부끄러운 일의 결과입니다. 

마치 롯이 죄악의 땅인 소돔에서 도망쳐 나와서 산속의 동굴로 들어갔지만 그들이 도망쳐 나온 소돔이 롯이 숨은 굴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이고 죄에 붙잡혀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부끄러운 죄악 가운데에도 구원의 통로를 열어주시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부끄러움과 죄를 대신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우리에게 여러 질문과 함께 여전히 우리의 부끄러움을 다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주하게 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생의 절박함과 두려움 사이에서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분별력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2. 롯의 부끄러운 결과로써 낳은 모압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로 들어오는 과정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말씀에서 발견한 사람에 대해 가져야 할 우리의 태도와 마음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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