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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창세기

[말씀묵상] 창세기 20:8~18 “하나님을 두려워할때”

by 기대어 보기를 2026. 1. 9.

[창20:8-18]
8 아비멜렉이 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 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10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11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12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13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14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15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16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
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18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아브라함의 거짓말로 인해 아비멜렉 집안의 여인들의 태가 닫혔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불러 아브라함의 죄에 대해 책망과 원망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거짓말이 아비멜렉 왕가에 심각한 문제뿐만 아니라 그의 나라도 큰 죄에 빠질 뻔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두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는 그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또 하나는 사라는 실제로 자신의 누이가 맞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이복누이로서 아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의 윤리기준으로 보면 조금 놀랄 수도 있지만 고대사회에서 근친결혼은 어느 정도 허용되었거나 그럴 수밖에 없던 환경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라를 아브라함이 누이라고 한 것은 거짓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궁색한 변명이라고 느껴집니다. 

사라는 자신의 누이라는 사실을 넘어서 자신의 아내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누이였다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본질입니다. 

아브라함의 부끄러운 거짓말과 변명은 과거 이집트에서의 똑같은 일을 떠올립니다. 그때에도 아브라함의 거짓말로 인해 파라오가 죄를 범할 뻔했고 하나님은 파라오의 집안에 재앙을 내리셨었습니다. 

그때에도 아브라함은 파라오로부터 책망과 원망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궁색한 변명을 했으나 그것은 본질을 피해 간 언어도단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태도는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창12:18-19]
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창20:9-10]
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10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이라 불리는 그 위대한 아브라함이 이런 책망과 원망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받았습니다. 

신앙을 떠나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와 보편적인 윤리적 관점에도 한참 모자란 일을 했다는 부끄러운 책망입니다.

그나마 한 가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아브라함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약자였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아브라함을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보다 사라가 더 약자였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보다 더 약자인 사라를 두려운 상황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의 변명 중 하나를 묵상해 봅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이 말을 그대로 묵상해 봅니다. 아브라함이 무엇 때문에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인륜과 천륜에 어긋나는 악행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죄가 관영해질 것입니다. 그 안에는 언제나 약자를 향해 흘러 내려가는 폭력이 있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대가 가져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호소합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이 필요한지를 반증해 줍니다. 

이 관점에 공감하십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세상의 모습에서 아브라함의 말에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아브라함이 그랄의 주민들을 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아브라함 스스로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면 그랄의 사람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있음에도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자 거짓말을 하는 잘못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려움은 이 시대의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종교든, 정치든, 세상을 향한 두려움과 걱정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보이는 현상이나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걱정은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환경도, 세상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세상에 대해 전혀 다른 마음을 가지게 되지는 않을까요?




[묵상을 위한 질문]
1. 하나님을 두렵게 생각하신 일이 있습니까?
2.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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