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0:1-7]
1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2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3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4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5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6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말씀을 계속 읽어 왔다면 오늘 본문은 매우 난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흐름을 보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 사라는 90세가 된 이후입니다. 그래서 순서대로 본다면 100세의 아브라함이 네게브 땅으로 옮겨간 이후에 그랄에 거류할 때 과거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데려갔습니다.
사라를 데려간 이유는 사라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함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당혹감을 느낍니다.
사라의 나이가 90세고 경수가 끊겼습니다. 즉, 폐경이 지났습니다. 그만큼 나이가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나라의 왕이 자신의 아내를 삼기 위해 90세의 나이 든 사라를 데려갔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흥미로운 문헌들이 있습니다. 창세기외경에 사라의 미모에 대한 내용이 있고 유대 전승인 미드라시에도 세계 4대 미인을 소개하는데 그중 한 명이 사라, 라합, 아비가일, 에스더입니다.
특히 미드라시에는 아브라함이 이집트에 들어갈 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강물에 비친 사라의 모습을 보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태양빛과 같았습니다. 마치 어떤 여자도 사라에 비해 원숭이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나는 당신이 아름다운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인은 방탕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집트인들이 당신을 본다면 내 안전을 염려하여 당신을 이 캐비닛에 숨겨두겠습니다.”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흥미로 보시면 됩니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내로 삼고자 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현실적인 이유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정략결혼과 같은 것입니다.
당시에 아브라함은 거류민이었으나 꽤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아브라함이 개인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을 데리고 동방의 왕들과 전쟁을 해서 조카 롯을 구해왔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아브라함은 비록 거류민이지만 강력한 군사력과 더불어 엄청난 재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비멜렉이 왕이라도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과 정치적 동맹, 군사적 우호관계를 갖는 것에 관심이 있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것도 정답은 아닐 수 있습니다. 모르는 부분은 모르는 채로 남겨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 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의 결과는 자신의 아내를 빼앗길뻔했고 아비멜렉까지 큰 화를 입을 뻔했다는 것 입니다. 다행히도 아비멜렉의 마음이 악의적인 것이 아니라 순수한 것이었기에 하나님께서 개입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의인의 기도와 간구에 대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아브라함이 롯을 위해 기도했고 아브라함의 기도로 롯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을 묵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하자 그 결과로 아비멜렉이 곤경에 처했습니다.
의인의 선함 기도는 선한 일을 만들지만 의인의 거짓은 반대의 결과도 만들어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관과 태도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세상에서 소금과 빛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발견합니다. 그러나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그저 땅에 뿌려지고 밟힐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이 생명의 통로가 되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에서 우리는 그저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 갖는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살아가야 함을 느낍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것일까요?
2.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변화되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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