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1:8-21]
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삭의 이복형인 이스마엘이 동생인 이삭을 놀렸습니다. '놀리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צָחַק(차히크)]라는 단어입니다. 이쯤 되면 익숙하시지 않을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통해서 아들 이삭을 낳게 하시겠다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했던 행동입니다. 그 말을 엿들은 사라가 했던 행동입니다.
‘웃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기쁨의 웃음도 아니고, 믿을 수가 없어서 나오는 헛웃음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조롱하고 웃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희롱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이스마엘이 배다른 동생인 이삭에게 장난을 치거나 희롱하면서 웃었다는 의미입니다.
‘웃음’이라는 의미를 꼭 연결시키려 하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마음이 조금 무거워집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가정 안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은 왜 이삭을 놀렸을까요?
이스마엘의 마음이 드러나 있지 않으니 알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의 전승 자료들을 보면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내용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아니니 참고만 하면 좋을 듯합니다.
미드라시 라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구약성경에 대한 주석입니다. 유대교 내에서는 정통성을 인정받는 표준 주석입니다. 이 미드라시 라바에 오늘 본문에 대한 주석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렸다는 것은 다음의 의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1. 이스마엘이 이삭에게 한 행동은 실제적인 위협 행동이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와 같은 해석을 토대로 이스마엘과 이삭 사이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박해’로 보았습니다.
[갈4:28-29]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2. 이스마엘이 이삭의 이름을 가지고 놀렸고 상속권을 주장했다.
이삭의 이름의 의미를 앞에서 나눴습니다. 그 의미는 ‘읏음’입니다. 일종의 언어유희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렸을 때를 생각해 보면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것은 언제나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 의미로 이스마엘이 동생의 이름을 가지고 놀렸다고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이삭의 이름을 통해 자신의 상속권을 드러냈다고 봅니다.
“너희는 이 아이를 보며 기뻐하지만(웃지만) 사실 내가 장자다. 아버지는 나에게 두 몫의 상속을 줄 것이며, 이 아이는 결국 내 종이 될 것이다.”
이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참고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이런 질문을 해 봅니다. 이스마엘은 왜 이삭에게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저는 그다음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태도를 보면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에서도 이삭에 대한 약속을 하나님이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속으로 이스마엘이나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라와 하갈 사이에 있었습니다. 짐작건대 사라와 하갈의 사이는 꽤 불편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하갈은 사라의 여종이었는데 아브라함의 아이를 낳게 되면서 사라의 자리를 탐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 하갈의 태도에 사라는 화가 나고 경계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아브라함의 아들이기는 하나 자신의 아이가 아닌 이스마엘에게 살갑게 하지도 않았을 것 입니다.
한 가정 안에 그런 감정들이 오랜 시간 쌓아지면 보이지 않는 그 갈라진 틈 사이로 많은 것들이 들어찹니다. 이스마엘은 큰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고 자신의 생모인 하갈과 사라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차별을 묵도했을 것입니다.
하갈의 태도는 어땠을까요? 하갈은 항상 사라에 대해서 좋지 않은 마음과 감정들을 이스마엘에게 드러내고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장자라는 것을 끊임없이 암시했을 것 입니다. 어쩌면 적극적으로 가르쳤을 수도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성인이 아닙니다. 아직 미성숙한 청소년입니다. 그런 이스마엘은 부모의 말과 눈으로 보이고 경험하는 차별 속에서 어떤 마음이 생겼을까요?
이삭이 태어나면서 더욱더 그런 차별과 경계심은 더 커젔을 것입니다. 사라가 이삭에게 온 정성을 쏟는 모습을 보면서 더더욱 마음 한켠에는 억울함이나 분노같은 감정들이 쌓였을 것 입니다.
그런 감정들은 동생 이삭을 보호하고 지켜주어야 할 대상이 아닌 경쟁자로 보게 만들어 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이스마엘의 잘못이 아닙니다. 어른들의 잘못입니다. 그런 어른들의 잘못이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의심의 웃음으로, 사라의 믿을 수 없었던 웃음으로 나타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기쁨의 웃음으로 이삭을 주셨으나 또다시 사람의 희롱의 웃음으로 이스마엘에게 흘러 내려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먼저 서 있는 어른인 우리가 잘해야 합니다. 앞에 있는 사람이 모범이 되어야 뒤따라 오는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서 부모로서 살아가는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가족에게 보여주는 자신의 잘못된 말이나 행동은 무엇입니까?
2. 바꾸고 싶은 말이나 행동은 무엇입니까?
3. 스스로의 변화를 위해 가족이나 지인의 부탁하고 싶은 또는 도움받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묵상 >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말씀묵상] 창세기 21:1~7 “웃게하시는 하나님” (0) | 2026.01.10 |
|---|---|
| [말씀묵상] 창세기 20:8~18 “하나님을 두려워할때” (1) | 2026.01.09 |
| [말씀묵상] 창세기 20:1~7 “사라의 외모 그리고 아브라함의 거짓말” (0) | 2026.01.08 |
| [말씀묵상] 창세기 19:30~38 “동굴안의 소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1) | 2026.01.07 |
| [말씀묵상] 창세기 19:23~28 “롯의 아내 소금기둥이 되다” (1) | 2026.01.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