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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창세기

[말씀묵상] 창세기 31:43~55 “여갈사두다와 갈르엣”

by 기대어 보기를 2026. 3. 12.

[창31:43-55]
43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44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45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46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47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니
48 라반의 말에 오늘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며
49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
50 만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함이었더라
51 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52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
53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54 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밤을 지내고
55 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


 

라반과 야곱이 언약을 세웁니다. 야곱이 돌 하나를 가져다가 기둥을 세웠고 라반의 형제들이 돌을 가져와 그 주위에 쌓아 돌 무더기를 만들었습니다.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고 불렀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갈사하두다 [ַיְגַר שַׂהֲדוּתָ아(예가르 사하두타)]는 모으다는 의미와 증거라는 의미가 모여서 ‘증거의 더미’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입니다. 

 

갈르엣 [גַּלְעֵד(갈레드)]도 증거의 무더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의미인데 왜 다르게 불렀을까요? 언어의 차이입니다. 여갈사하두다는 아람어입니다. 갈르엣은 히브리어입니다. 생각해보니 자연스러운 차이입니다. 라반은 아람어를 사용했고 야곱은 히브리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궁금한 점들이 몰려옵니다. 바로 언어의 차이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언어가 달랐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읽었습니다. 그런데 언어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은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태어나면서 사용한 언어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은 외국입니다. 인종, 국경만 다른 것이 아니라 언어가 달랐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가나안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의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이 언어에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가나안의 언어를 습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람어와 가나안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아람어보다 가나안어를 더 익숙하게 잘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야곱이나 에서는 완전히 가나안어밖에 사용할 줄 모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장치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가나안 여인이 아니게 하셨습니다. 아람어를 쓰는 여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야곱이나 에서가 아람어를 자연스럽게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특히 야곱은 집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했고 어머니 리브가와 훨씬 가까웠습니다. 그러면 어머니의 모국어인 아람어를 배웠을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어쩌면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진행된 일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배경 속에서 야곱은 아람어도 사용할 줄 알았기에 라반이나 라헬, 레아와 소통의 장벽이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학자들은 아람어와 가나안어가 상당히 비슷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지냈습니다. 꽤 긴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어떤 언어를 사용했을까요?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히브리어를 사용할 기회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언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언어는 단순히 단어나 소리의 차이가 아닙니다. 언어 안에는 문화가 담겨 있습니다. 다른 언어를 20년 동안 사용한다는 것은 생각하는 순서와 체계도 영향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물론, 이 부분은 잘 모릅니다. 

 

이런 생각을 끄집어내는 이유는 정체성에 대한 것 때문입니다. 야곱은 20년 동안 아브라함의 신앙의 바탕에서 떠나 동방 사람의 땅으로 왔습니다.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그곳의 문화와 관습을 배우며 살았습니다. 어쩌면 그 시간은 사람의 정체성을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저 역시 고향이 있지만 고향에서 나온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마음은 여전히 고향이지만 몸으로는 낯선 땅이 된 느낌입니다. 

 

그간 야곱을 옹호하거나 좋은 점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았지만 오늘 야곱을 칭찬해 보고자 합니다. 라반은 그곳을 아람어로 ‘여갈사하두다’라고 칭했습니다. 야곱도 아람어를 알고 익숙했습니다. 그렇다면 라반이 칭한 이름 그대로 야곱도 그곳을 ‘여갈사하두다’라고 해도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야곱은 그곳을 자신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갈르엣’이라 불렀습니다. 그것은 고집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언어로 불렀습니다. 

 

우리도 야곱과 같습니다. 지금은 세상이라 부르는 이 땅의 삶을 살아가며 세상의 문화 속에 터전을 일구고 살아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영적 신분은 하나님 나라의 자녀입니다. 그것은 우리만의 언어가 있고 우리만의 사고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생을 세상 속에 살아왔더라도 결코 잊지 않을 하나님의 자녀의 언어가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결코 잊지 않아야 할 하나님의 자녀의 언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무엇일까요?
  2.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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