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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창세기

[말씀묵상] 창세기 45:25~28 “아버지의 마음”

by 기대어 보기를 2026. 5. 23.

[창45:25-28]
25 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26 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하더니
27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28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을 기쁨으로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적지 않게 놀랐을 것입니다.

먼저 베냐민이 무사히 돌아와서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므온도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서 감사했을 것입니다. 또 수나귀와 암나귀에 실려 있는 양식과 이집트의 진귀한 것들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이집트에서 보내온, 사람을 태울 수 있는 큰 수레였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을 맞이하며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요셉이 살아 있고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야곱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겪은 슬픔을 생각해 보면, 그 옛날 아들들이 요셉의 피 묻은 옷을 가져왔을 때 야곱은 요셉이 들짐승에 의해 찢겨 죽었을 것이라 직감했습니다.

모든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깊은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눈앞의 피 묻은 옷은 요셉이 겪었을 고통을 상상하게 하며 야곱의 마음을 찢어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눈앞에 드러난 증거를 보면서도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죽지 않고 반드시 살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 그것은 희망이라기보다는 간절한 바람이었습니다.

야곱은 어쩌면 한참 동안 문밖의 소리에도 마음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혹시나 요셉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간절함 때문입니다. 요셉의 옷에는 피가 묻어 있었으나, 혹시 이 세상 어딘가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지는 않을까 하는 간절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가족들의 위로와 주변의 위로 속에 스스로도 마음속에 붙들고 있던 요셉의 생존에 대한 희망을 내려놓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요셉을 떠올리면 여전히 마음이 아프고 힘이 들지만, 이제는 요셉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막연한 바람처럼 남아 있을 뿐 더는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야곱이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지만, 말씀을 보니 요셉이 형들에게 전하라고 했던 말과 이집트에서 보내온 수레를 보고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야곱의 상태를 성경은 ‘기운이 소생한지라’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여기에서 기운이라는 것은 우리의 생각에는 힘이나 에너지, 즉 당시의 야곱이 힘이 없는 상태에 있었다가 힘을 내고 마음을 새롭게 했다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에서 기운은 [רוּחַ(루아흐)]입니다. 이는 ‘영’, ‘호흡’ 등을 의미하는 단어로, 단순히 체력이나 기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 호흡, 생명의 숨결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꺼져가던 생명력이 살아났다’, ‘생명의 호흡이 돌아왔다’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족하도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רַב(라브)]라는 단어로 풍성한, 가득 채워진 등의 의미입니다. 야곱의 마음이 가득 차고 채워졌다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내면 어딘가가 항상 비어 있었고 채워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요셉의 빈자리가 가슴속에 계속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의 내면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배불리 먹고 기근 속에서도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양식이 생겼습니다. 세상에 온갖 귀하고 진귀해 보이는 물건들이 생겼습니다. 가축들이 생겼습니다. 멋진 수레가 생겼습니다.

사실 살아가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들입니다. 맛있는 음식, 멋진 옷, 좋은 자동차, 물질, 갖고 싶은 최신 전자제품부터 고가의 예술품과 명품까지….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런 것들을 이미 눈으로 확인하고도 성경에는 기뻐했다거나 감사했다거나 기운이 회복되었다거나 하는 표현이 없습니다.

야곱의 기운을 소생시킨 것은 눈앞의 물건들이 아니라 요셉이 살아 있다는 말 한마디였습니다. 야곱은 그것으로 ‘족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 부모의 마음이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야곱과 같은 슬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들은 ‘어딘가에 살아만 있어다오’라는 마음 한구석의 간절한 바람을 품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런 아픔을 가진 부모에게는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이 살아 있다는 소식 하나가 온 세상일 것입니다. 야곱이 그런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야곱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탕자의 이야기에서도 재산을 가지고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오늘 야곱이 보여준 모습에서도 똑같은 마음이 느껴집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러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사는 것, 소위 성공이라는 말에 집착하며 살아가고 온통 그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죄와 사망의 옷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 생명의 문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으로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열려진 문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시대의 풍조를 따라 몰려다니며 십자가의 피가 칠해진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문 너머에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올린 탕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요셉도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라고 형들에게 물었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누군가는 세상의 재물에 관심이 있고, 누군가는 자신들이 지은 죄로 인해 두려움을 느끼고, 다투고, 싸우고, 회피하고, 절망하고, 원망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탕자처럼, 그리고 요셉처럼 ‘기다리는 아버지’를 생각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의 죄와 부끄러움을 넘어 십자가의 문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보다 우리 자신 하나를 더 기다리고 간절히 바라시는 아버지께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인 야곱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성경은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해 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묵상해 봅니다.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에 끊임없이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본문에서 만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2. 우리가 진정 관심을 두고 살아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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