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9:28-33]
28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야곱은 아들들에 대한 예언이자 축복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말을 이어갑니다.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이는 앞에서 요셉에게 맹세하게 했던 내용입니다.
야곱이 죽으면 이집트가 아닌 가나안 땅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위해 구입했던 굴, 사라가 묻혀 있고 아브라함도 묻혔고, 야곱의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인 리브가가 묻힌 그곳, 또한 자신의 아내인 레아가 묻힌 곳에 묻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한 마지막 유언을 묵상해 봅니다.
한 가지는 장지에 대한 유언입니다. 야곱은 먼저 자신들의 조상들이 묻혔던 가족 묘지에 자신도 장사 지내 달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반드시 우리에게 찾아오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고되지 않고 찾아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에 대해서 평소에 준비하지 않습니다.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매일 마음에 품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더 잘 살아갈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반드시 찾아오는 죽음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시되어 있고 부정적인 것이라는 시각이 많습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종활’이라는 말이 얼마 전부터 사용되고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활동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일본에서 2000년대 후반에 등장했습니다. 일본 같은 경우 우리나라보다 훨씬 먼저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어 독거노인이나 무연고 사망 등의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종활이라는 말입니다. 죽기 전에 스스로 자신의 마지막을 정리하자는 문화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 종활에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으로부터 시작해서 임종에 대한 준비, 장례의 준비를 포함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활동이며 동시에 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준비하는 활동입니다.
지금 야곱이 하고 있는 일은 그 종활의 일부입니다. 아들들을 모으고 축복과 예언을 합니다. 그리고 장례 장소를 지정해 줍니다.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경우는 나이가 많고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상황에서 한 일이지만 죽음이라는 것이 그렇듯 예고 없이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종활은 우리에게도 먼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어떤 순간에 우리는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정리해야 할 것들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들을 하고, 자신이 죽은 이후에 어떤 장례를 치르고 어떻게 안치될지에 대한 생각들이 필요합니다.
장지의 경우 죽음 이후에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느끼는 것이 없겠지만 자녀들이나 자신의 장례를 책임져 줄 이들에게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장례가 치러지고 어디에 안치될지를 안다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덜어 낼 수 있고 죽음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준비하지 못한 사이에 그와 같은 일들을 마주해 경황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준비된 죽음과 장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과 애도, 그리고 위로가 더 자연스러워질 것입니다.
두 번째, 야곱의 이 유언은 참 흥미롭습니다. 지금의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신앙입니다. 죽음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죽음에 대한 이해는 시간이 지나면서 체계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 당시에는 어떠했을까요? 창세기에서 찾을 수 있는 죽음과 관련된 것은 천국이나 지옥과 같은 개념이 없습니다.
다만 야곱이 요셉의 죽음 이후에 ‘스올로 내려간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스올은 [שְׁאוֹל(셰올)]로 무덤이라는 의미와 지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천국이나 지옥의 개념보다 죽은 자들의 세계에 가깝습니다. 야곱은 악인도 아닌데 스올로 내려간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활이나 천국과 같은 개념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런 부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육체의 죽음은 그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숨을 거두고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상들과의 연속성, 하나님과 맺은 언약으로 이어진 끊어지지 않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탈무드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의인은 죽어서도 살아 있다.”
복음서에서 사두개파와의 부활에 대한 대화에서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막12:26-27]
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당시에 아브라함이나 이삭 그리고 야곱은 부활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가 있었는지는 모르나 하나님 안에서는 육신은 죽었으나 죽은 것이 아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넘어 자신들을 붙들어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죽는 사람은 살아 있는 것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 여러분은 죽은 다음 어떻게 장례되기를 원하십니까?
- 죽음 앞에 가장 걱정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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