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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골로새서

골로새서 4:1

by 기대어 보기를 2025. 6. 14.

[골4: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상전들을 향한 권면입니다. 이 말씀은 3장의 종들을 향한 권면과 짝을 이루어 묵상하면 좋을 듯합니다.   

[골3:22-23]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상전은 놀랍게도 *κύριος(퀴리오스)* 라는 단어입니다. 다른 본문에서는 ‘주’ 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며 ‘주인’ 이라는 의미입니다. 

당시에는 주인과 노예라는 신분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계급사회를 건강한 사회로 보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모두 평등하고 모든 사람은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이라는 의미는 오늘날 신분계층을 의미하기보다는 어떤 것에 주도권을 쥔 사람으로 이해를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기업이나 단체, 공동체의 경영진, 리더와 같은 사람들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본다면 이 말씀은 특정 직업, 특정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국한된 말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미미한 말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꼭 그런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란 ‘주의인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하여건 자기 스스로에 대하여건 스스로의 자기결정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내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주도권을 내가 가진 사람이라면 내가 주인인 것 입니다. 이것은 주도권에 대한 상하관계가 아니더라도 가능합니다. 이를테면 어떤 공동체에 구성원들이 모두 주인의식을 가지고 어떤 결정을 하는데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나 주인으로서 스스로의 의견을 주도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자기주장을 하면 그 공동체는 분열되어 버리거나 타협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주인의식이라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의견도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수용하고 포용할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의식에는 힘이 필요합니다. 내면의 힘이 필요합니다. 내면에 힘이 있는 사람이 주도권을 주장할 수도, 다른 사람의 주장을 포용하고 수용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면의 힘을 지닌 사람이 ‘주인’인 것 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관계에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관계에서 상처를 경험한 사람들은 누군가를 용서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피해의식에 함몰되거나 자기 주도권을 상실해 버립니다. ‘회복’이라는 것이 그 사람에게 일어난다는 것은 그 상처 입은 사람이 내면의 힘을 되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도권을 되찾고 스스로가 주인이 될 때 비로소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생각을 확장하니 사실은 ‘주인’과 ‘종’의 관계도 뒤 엉켜 버립니다. 사회적 제도 아래 주인이나 노예의 신분이 존재했지만 내면의 차이로 본다면 뒤 바뀔 수도 있습니다. 신분적으로 주인이라도 자기 주도권을 가지지 못한 사람도 있고 신분적으로 노예인 사람이라도 내면의 힘을 가지고 주인의 명령에 주도적으로 행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읽어 보면 사도 바울과 실라 복음을 전도하다 옥에 갇힌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힌 죄인이되고 그들을 지키고 감독하는 간수는 그들의 상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읽어 보면 누가 진짜 주인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혔으나 그곳에서 주도적으로 기도하고 찬송하며 기쁨 가운데 있었고 하나님이 지진을 일으켜 감옥의 문들을 열었을 때 간수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간수를 오히려 위로하였고 그들은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기까지 했습니다. 

신분이나 지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면의 힘이 주인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이 내면의 힘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힘이 아닙니다. 소위 ‘꼰대의식‘이 ’주인의식‘은 아닌 것입니다. 

주인은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종‘이라는 신분계층이 아니더라도 상관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의와 공평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말 그대로 그것이 ’공평‘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도 ’종‘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도 일깨웁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진짜 주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주로 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된다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를 모두 행해야 합니다.

1. 의와 공평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수 있어야 합니다. (주인에 대한 권면) 
2. 모든 일(타인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에 눈가림이 아닌 주님을 경외하듯 성실한 마음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종에 대한 권면)

우리는 신분과 역할 지위에 관계 없이 주인이 되어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된다는 것은 위의 두 가지 책임이 뒤 따르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들.    
1. 여러분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관계 또는 일은 무엇입니까?
2. 그 역할을 감당할때 의와 공평의 마음을 가지고 또 하나님을 생각하며 결정 또는 행동하셨습니까?
3. 주인 의식을 가지고 타인의 주장을 수용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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