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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골로새서

골로새서 4:11

by 기대어 보기를 2025. 6. 24.

        
[골4: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유스도라는 하는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헬라어로 *Ἰοῦστος(아우스토스)* 라는 이름으로 라틴어의 ‘의로운’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유스도라는 이름은 신약성경에 3명 정도가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1:23절에는 유스도라 하는 요셉이
사도행전 18:7절에는 유스도라 하는 디도가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유스도라 하는 예수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각각 요셉, 디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유스도로 불리고 있습니다. 유스도는 사람의 성격적인 특징이 반영되는 로마식 이름으로 정직한, 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름이 선호된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이렇게 이중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0절에 요한이 마가로, 사울이 바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조금 흥미롭게 보이실 수 있는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의 유스도의 유대인 이름은 ‘예수’입니다. 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이름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예수님은 아닙니다. 

사실 당시에 ‘예수’라는 이름은 아주 흔한 이름 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로마의 압제에 놓여있던 유대인들에게는 구원과 희망의 의미가 있는 이름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자녀의 이름을 예수로 많이 지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유스도도 예수님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분을 위해서 이 사람을 유스도라 부르겠습니다. 

본문의 유스도는 바울이 ‘할례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할례파란 *περιτομή(페리토메)* 로 할례를 받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 면에서 유스도는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파는 아닙니다. 골로새서의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의 부재로부터 오는 혼란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중에는 할례파에 대한 부분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에 할례를 받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때부터 이어져내려 온 유대인의 특별한 의식입니다. 그것은 유대인이라는 증표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표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할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고 동시에 율법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이라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할례파들의 이런 주장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율법주의로 회귀시키는 주장으로 십자가의 은혜를 헛되이 만드는 것이라 했습니다. 할례파의 주장은 구원을 받으려면 믿음과 더불어 할례도 받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유스도는 할례파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좋아할 입장이 아닌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스도는 바울이 싫어하는 할례파와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정말 궁금합니다. 유스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어떤 모습 때문에 바울은 그로부터 위로를 얻었을까요?

성경에 구체적으로 그 관계가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습을 묵상해 보면 점점 분열과 대립으로 나아가는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다름의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에게 위로가 될 만큼 함께 동역할 수 있는 모습이 유스도에게 있었습니다. 협력, 협동, 협치, 동역과 같은 단어들이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분명 가치관이 달랐을 것 입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함께 일하는 데에는 힘을 모았습니다.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同役(동역)* 함께 일하다는 의미로 힘을 하나로 모아서 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이처럼 함께 힘을 모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저마다의 실익이나 욕구, 가치관, 명분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같이 나의 실익이나 나의 욕구를 넘어선 더 높은 차원의 공공의 선을 위한 일일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유스도가 그립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동역자가 되어주고 있습니까?



    
묵상을 위한 질문들.                    
1.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에서 어떤 동역을 하고 있습니까?
2. 그렇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어떻게 하면 동역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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