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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창세기

[말씀묵상] 창세기 1:6~8 창조신앙

by 기대어 보기를 2025. 10. 18.

[창1:6-8]
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시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하루라는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하나님은 그 하루라는 시간 동안에 세상을 창조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둘째 날을 보면 하나님은 물 가운데[תָּוֶךְ(타베크) 중간, 중앙]에 궁창[רָקִיעַ(라키아) 넓게 퍼진 것]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궁창을 사이로 위에도 물과 아래에도 물로 나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과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구에 대한 과학적 이론들을 바탕으로 한 고생대 시대의 지구의 대기와 구성에 대한 다양한 추론들을 바탕으로 이 말씀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사실적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입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고대사회에서도 추론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경험하게 되는 자연현상을 바라보면서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세상은 넓게 펴진 사각형 모양의 판이었고 그래서 하늘도 넓게 펴진 곳, 우리말로 궁창이라고 번역된 것으로 이해했을 때 비가 내리는 현상을 보면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저 넓고 파란 하늘 위에도 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또 자연과학에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원리등을 설명할때 역시 하늘위에 물이 있다는 의미를 설명할 수도 있을 것 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시는 분들이 고맙습니다. 성경말씀이 진실이고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실에 기반한 것임을 변증 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 마음의 선함에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경말씀 특히 창세기의 창조의 기사와 같은 말씀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입장은 ’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는 신앙적인 입장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비이성적이거나 우화 같은 것을 믿는 어리섞은 것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이 그렇습니다. 

한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죄를 지은 우리의 죄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 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신이 피조물을 만들고 그 피조물이 잘못되자 그 피조물을 살리기 위해 신이 대신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도대체 신이 그럴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볼펜을 하나 사서 쓰다 그것이 고장 나면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하나를 사서 씁니다. 볼펜이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만 먹으면 100개, 1000개 그 이상이라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데 그 망가진 볼펜 하나를 고치기 위해서 죽을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Rese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PC나 기계, 또 게임 혹은 프로그램을 사용하다가 문제 상황을 만나면 그것을 이전 초기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세상을 ’리셋‘ 하실 수 있습니다. 인류가 죄를 지어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면 하나님은 ‘다시!‘ 라고 마음먹고 처음으로 되돌려 다시 세상을 얼마든지 창조할 수 있습니다. 

영화 어벤저스의 타노스가 핑거스냅을 통해 우주 생명체의 절반을 먼지로 만들어버리는 것처럼 세상을 리셋하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것을 앞에서 저는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으로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음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근본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통로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것은 논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습니다. 

다시 본 줄기로 돌아가겠습니다. 과학과 신학, 논리와 이성, 심리학, 문화를 통해 성경을 읽고 그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성경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폭넓게 이해하는 좋은 방법들입니다. 그 모든 시도들이 좋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바라보는 본래의 시각은 ‘믿음’입니다. 그것이 문학적인 양식이든, 과학적인 원리든, 문화적인 것이든 세상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그리고 확고히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니 창세기의 창조기사에 대한 다양한 의문들 이를테면 성경의 ‘하루’는 실제로 얼마만큼의 시간인가? 세상은 정말 이런 순서로 창조되었나?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 유신진화론이냐? 빅뱅이냐? 의 문제들은 흥미롭고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으나 성경을 바라보는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들에게는 겸손하나 확고한 믿음으로 바라봐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를 더 한다면 앞에서 잠깐 나누었던 내용입니다.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언제 기록되었을까요? 누가 기록했을까요? 전통적으로 모세가 기록한 성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모세도 성령의 감동으로 알 수 없던 시대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창세기의 기사는 역사적이거나 과학적이거나 객관적인 과정이나 그런 관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분히 문학적이고 본질적으로 신앙의 고백적 차원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렇게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우리는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문자 그대로 믿는 것 입니다. 구약성경은 고대 근동의 문화적인 이해와 유대인들의 문화적 이해를 바탕으로 기록되어 있고 문학적인 양식과 표현들이 있기때문입니다. 우리가 뜨거운 매운탕을 먹으며 “아~ 시원하다”고 말하는 이 실제로 시원하다는 의미가 아닌것과 같은 것 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으로부터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가치관과 목적, 태도,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결정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창세기의 창조의 기사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바꿔낼 믿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창세기 말씀을 읽으면서 가진 궁금증들은 무엇입니까?
2. 창세기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삶의 가치관이나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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