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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창세기

[말씀묵상] 창세기 1:2~5 b - 빛이 있으라

by 기대어 보기를 2025. 10. 15.

[창1:2-5]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빛이 있으라”

하나님의 한 음성, 형태가 없고 짙은 어둠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의미 없음의 시간과 공간을 꿰뚫어 내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을 조금 더 묵상해 보겠습니다. 

어떤 일을 미뤄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가령 청소해야 한다거나 병원에 가서 정기 검진을 해야 한다거나 한 번쯤 만나야 할 누군가를 만나는 일 같은 것입니다. 

저의 경우 이와 같은 일들을 미뤄두는 마음의 밑바탕에는 어떤 불편함이나 귀찮음 등의 이유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시급하지 않으니 그냥 그 다음으로 미뤄두는 것입니다.

청소를 예를 들어 묵상해 보겠습니다. 집안에 엉망이 된 공간이 있습니다. 너무 뒤죽박죽이어서 도저히 청소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공간입니다. 어쩌면 안 쓰는 오래된 물건들을 마구 쌓아놓은 다락이나 창고, 안 쓰는(정리되지 않아서 쓸 수 없게 된) 방, 베란다의 한쪽 귀퉁이 같은 공간입니다. 

그런 공간은 당장 쓸 필요가 없는 물건들을 가져다 쌓아 놓고는 잊어버리게 되는 공간입니다. 아마 오래도록 그냥 그렇게 방치되어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 공간을 아주 가끔 찾을 뿐 대부분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공간을 매일 마주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집안에 정리되지 않고 흐트러지고 먼지가 수북이 쌓이고 알 수 없는 냄새와 그 속고서 무엇이 썩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그런 공간을 매일 마주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불편함과 더불어 그 공간으로 인해 상당한 스트레슬 받게 되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할 수 만 있다면 그 공간을 정리해 버릴 것입니다. 

그때의 세상을 바라보셨던 하나님의 마음이 그와 같았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창세기 초반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마음과 가치관은 ‘생명은 아름답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가 아릅답다’, ‘세상은 사랑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그때의 세상을 바라보신 하나님은 결코 그것을 그렇게 내버려 두시지 않았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빛이 있으라”라는 말씀으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빛이 있으라는 것은 하나님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창조하셨다는 의미를 넘어 그 어둠에 감추어진 실체를 마주하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오랫동안 관심밖에 두었던 창고와 같은 공간을 청소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그 방의 문을 열어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치워내고 정리해야 하는지를 확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빛이 있으라”라는 말은 어두워서 보이지 않으니 보자는 의미를 넘어 그 어둠 속에 감추어진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겠다는 의지입니다. 

앞에서 나눴듯이 그때는 

땅은 혼돈[תֹּהוּ(토후) 황폐한, 불모지, 텅 빈]했고 공허[בֹּהוּ(보후) 텅 비어 있는, 폐허] 했습니다. 땅은 있었으나 불모지였고 어떤 생명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텅 비어 있는 폐허였습니다.  흑암이 깊음 [תְּהוֹם(태훔) 물결, 대양, 바다, 심연, 깊은 웅덩이] 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일을 시작하십니다. 나눌 것은 나누시고 필요한 것들은 창조하시고 질서 있게 생명들을 지으시고 결국에는 생명이 충만한 세상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빛이 있으라”라는 그 음성은 그 텅 비어 있는 세상을 생명으로 충만한 곳을 만드시는 수고로움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 말씀만 해도 모든 것이 그 뜻대로 다 되시리라, 마치 내가 편안한 소파에 앉아서 누군가에게 커피 한잔을 달라고 하면 그것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내 앞에 도착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묵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함으로 생명이 충만한 세상을 만드셨고 그 세상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하나님께서 아름답다고 하신 그 세상 안에 있던 사랑과 생명이 충만하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어쩌면 어떤 의미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이전의 텅 비어있고 황폐한 그리고 보이지도 않는 깊은 어둠만이 가득한 것 같다고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우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미완성이거나 불완전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죄’의 결과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지을 것을 모르셨을까? 세상이 이렇게 되어 버릴 것을 모르셨을까? 모르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모의 입장이 되어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자녀를 양육하시면서 경험한 삶은 어떠셨습니까? 모든 순간이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고 행복하셨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자녀 때문에 눈물 흘리고 힘든 일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럼 또 질문을 해 봅니다. 자녀를 낳으면서 그럴 줄 몰랐습니까? 우리는 자녀를 양육하면서 힘들고 아픈 순간들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만났던 그 순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났던 순간일 것이며 지금도 부모로서 자녀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에게 세상이, 우리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이 죄로 인해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이 사라져 버리게 되어 버릴 것임에도 저와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이 있으라”는 한 마디는 하나님께서 어둠 속에 있는 그 모든 무질서와 더러움과 추악함의 실체를 마주하시고 그것들에 대해 책임지시겠다는 의지인 것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여전히 우리의 삶에 “빛이 있으라”라는 선언을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 내적인 공간이 어둠과 절망에 집어삼켜질 때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고 반드시 그곳에서 끄집어내시겠다는 의지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여러분의 삶에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선언이 필요한 곳은 무엇입니까?
2. 오늘 묵상을 통해 만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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