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9:13-18]
13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
14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15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

4. 스불론
야곱의 아들들을 알고 있다면 조금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스불론은 야곱의 10번째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서열 순서로 보면 유다 다음에는 단이 나와야 합니다.
다만 스불론이 나올 수 있는 조건을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같다는 것입니다. 스불론은 레아의 6번째 아들입니다. 그러나 이도 순서로 보면 잇사갈이 스불론보다 먼저 나와야 합니다.
야곱이 아들들을 축복하고 예언하는 순서의 기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몇 가지 견해들이 있긴 하지만 명확하게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스불론은 레아의 여섯 번째 아들입니다. [זְבוּלוּן(제블룬)]은 거주, 거주지, 함께 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레아는 야곱이 자신과 함께 거해 주기를 기대하며 이 이름을 붙였습니다.
야곱은 스불론에 대해서 예언합니다.
-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라
- 그의 경계는 시돈까지로다
스불론은 바다와 관련된 예언을 받습니다. 스불론은 후대에 지중해 연안 무역과 내륙의 상업, 국제 교역과 관련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스불론의 이와 같은 예언은 모세의 축복에서도 등장합니다.
[신33:18] 스불론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모세는 스불론 지파가 무역과 항해 등 외부 세계와 활발한 교역을 하게 될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5. 잇사갈
잇사갈은 스불론의 형입니다. 레아의 다섯 번째 아들입니다. [יִשָּׂשׂכָר(잇사카르)]는 보상, 품삯, 상급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레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수고를 기억하고 보상해 주셨다는 의미에서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잇사갈에 대한 야곱의 예언은 이렇습니다.
-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
나귀는 힘이 강하고 인내심이 많고 성실하게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동물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부정적으로는 노예와 같은 이미지도 있습니다.
그런 까닭인지 잇사갈 지파는 후에 가나안 땅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풍부한 농작물을 얻을 수 있는 비옥한 토지로 인해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게 됩니다.
-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고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
조금 교훈적인 메시지가 있습니다. 잇사갈 지파는 비옥하고 아름다운 토지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잇사갈 지파는 그 땅을 보고 좋게 여기고 토지의 아름다움을 좋아해서 어깨를 내립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는다는 노래 가사처럼 좋은 환경이 주는 안락함에 안주한 결과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노역하는 자가 되었다는 의미로 보기도 합니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이도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고 성실함의 의미로 보기도 합니다.
잇사갈 지파는 비옥한 토지와 아름다운 땅으로 인해 자주 침략을 받았습니다. 가나안의 왕들이나 미디안, 아람, 앗수르가 이 지역을 침략했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잇사갈과 스불론에 대한 예언을 했습니다. 묵상의 포인트가 도드라지지는 않지만 야곱의 예언을 축복이라는 관점으로 묵상해 봅니다.
야곱의 예언에서 어떤 아들은 축복이 아닌 것 같고 어떤 아들은 제대로 축복인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리고 각 아들들의 행위나 삶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기준과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을 토대로 어떤 삶이 축복을 받고 어떤 삶이 저주를 받게 되는지 어떤 법칙 같은 것을 찾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보니 그렇지도 않습니다. 스불론 지파가 무역과 같은 일들을 하고 잇사갈 지파가 비옥한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되지만 사실 그 지파 사람들의 세세한 삶을 들어가 보면 모두 각각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스불론 지파 중에도 농사를 주업으로 삼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잇사갈 지파 사람 중에도 무역을 하게 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의 예언은 누군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축복인지 저주인지도 불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예언은 축복도 아니고 저주도 아닙니다. 복된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은 결국 각자각자의 삶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복된 삶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삶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예언이라는 말에 혹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에서 살아야 할지 등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고 어떤 복을 받을지 아니면 어떤 문제를 겪을지를 알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들려주고 있습니다.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는 삶이 가장 복된 삶인 것입니다. 복된 삶에 대한 갈망함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그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 여러분의 적성은 무역과 농사 중 어떤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 여러분이 원하는 안주할 만한 환경은 어떤 것입니까?
- 복된 삶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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