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2:15-22]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들의 아버지의 양 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떼에게 먹이니라
18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버지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19 그들이 이르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였나이다
20 아버지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려두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라 하였더라
21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의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22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하루는 그 땅의 우물 곁에 앉았습니다.
그때 일곱 명의 여인들이 우물에 왔습니다. 그녀들은 그 땅의 제사장 이드로의 딸들인데 양 떼를 먹이기 위해 우물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다른 목자들이 와서 그녀들을 쫓아내려 했습니다. 아마 여성들뿐이라서 그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모세는 약자인 그녀들을 도와 양 떼들에게 물을 먹여 주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이드로는 모세를 청하고 모세는 이드로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지었습니다.
두 가지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먼저 우물이라는 장소는 만남의 장소로 자주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아브라함의 종이 만난 장소가 우물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만난 장소가 우물입니다. 오늘 모세가 십보라를 만난 장소도 우물입니다. 흥미로운 공통점입니다.
두 번째 흥미로운 지점에 머물러 보겠습니다.
모세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게르솜’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גֵּרְשֹׁם(게레솜)]인데 이는 [גָּרַשׁ(가라쉬)]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가라쉬는 추방하다, 내쫓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이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의미로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습니다.
이름은 한 사람의 고유한 호칭입니다. 그리고 단지 그를 부르는 호칭이 아닙니다. 이름 안에는 뜻과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담기도 하고 축복과 소망을 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윤리적 기준으로 보면 부모는 자녀를 낳을 때 그 이름에 최대한 좋은 의미, 축복의 의미를 담아 짓습니다.
그런데 오늘 모세는 자신의 불행하고 처량한 신세를 담아 마치 기억장치처럼 아들의 이름에 새겨 넣어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실 성경 속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녀의 이름을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아픔을 담아서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지금 같으면 절대로 선택하지 않을 이상한 이름을 자녀의 이름으로 짓기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개똥이, 말분이와 같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한 이름은 그래도 자녀가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의미로 지어준 것이었습니다. 개똥이는 귀신에게 데려갈 가치도 없는 아이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모세는 그런 이유도 아닙니다.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아들의 이름에 각인시킨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모세는 정말 큰 상실감과 동시에 두려움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사실 모세는 이집트에서 왕자의 신분이었습니다. 안락한 인생이 보장된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형제를 도우려다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고 파라오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받아 살기 위해 도망친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언제 파라오가 자신을 잡으러 사람들을 보낼지 알 수 없는 두려움 속에 신분을 속이고 조용히 숨어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또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모세는 아들이 한 명 더 있습니다. ‘엘리에셀’입니다. 그러나 엘리에셀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나중에 18장에 가서 그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엘리에셀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4장 19~20절을 보면
[출4:19-20]
19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20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모세가 아들들을 나귀에 태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 명이 아니라 또 다른 아들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른 아이의 이름은 왜 기록되지 않았을까요?
저는 성경이 단순한 역사의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기록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지금 모세는 게르솜이라는 아들의 이름처럼 쫓기며 도망자가 되어 나그네로 살아가는 시기입니다. 절망과 두려움, 처량함과 무상함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그것을 게르솜이라는 아들의 이름이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이름이 있었습니다. ‘엘리에셀’ 그 이름은 [אֱלִיעֶזֶר(엘리에제르)] 도움의 하나님, 즉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이름의 의미도 지금 미디안 땅에 나그네로 있는 모세의 또 다른 상황이기도 합니다. 즉, 모세는 나그네였지만 하나님이 모세를 도우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같은 상황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름을 발견합니다. 나그네가 된 비참한 상황이지만 반면에 그 속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은 있었습니다.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본문에서는 게르솜에 대한 언급밖에 없던 이유는 모세를 성숙시키시는 하나님의 과정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게르솜은 꼭 나쁜 의미만은 아닙니다. 이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그네였던 자신을 잊지 말라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그네였기에 나그네를 사랑해야 하고 그 나그네였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살아가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10: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오늘 나의 힘듦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배양하는 그릇이 되고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믿음을 붙잡는 시간인 것입니다.
[묵상을 위한 도구]
1. 최근 지치고 힘든 일은 무엇입니까?
2.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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