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4:27-31]
27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 하시매 그가 가서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에게 입맞추니
28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분부하여 보내신 모든 말씀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이적을 아론에게 알리니라
29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30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그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31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출5:1-9]
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3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4 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 하라
5 바로가 또 이르되 이제 이 땅의 백성이 많아졌거늘 너희가 그들로 노역을 쉬게 하는도다 하고
6 바로가 그 날에 백성의 감독들과 기록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7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8 또 그들이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에게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
9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모세는 아론을 만납니다. 그리고 아론은 모세의 대언자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이적을 행했습니다.
그러자 백성은 믿었습니다. 그들은 머리 숙여 경배했습니다.
모세는 이번에는 아론과 함께 파라오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광야에 나가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리려 하니 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파라오는 거절했습니다. 파라오는 그날 백성의 감독들을 불러 벽돌에 쓸 짚을 주지 않으면서 벽돌의 수량은 이전과 같이 그대로 생산하게 하라 명합니다.
이미 예견되어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도 모세에게 이런 반응이 일어날 것이라 이미 말씀하셨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지점에서 묵상해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은 믿고 감사했고 파라오는 믿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무거운 노역을 명령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몇 가지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과 파라오의 입장이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희망의 소식이었습니다. 반면 파라오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의 노동력을 통해 얻고 있는 부당한 이익을 손실하게 될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믿고 파라오는 믿지 않을 이유가 됩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파라오의 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파라오는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파라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견딜 만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으로 치부하고 더 힘든 노역을 시켜 버립니다.
이 차이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알지 못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파라오가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알다는 의미의 [יָדַע(야다)]에 아니다는 의미의 [לֹא(로)]를 붙인 말입니다. 즉,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야다'는 단순한 지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파라오가 정말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알지 못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 위협이 된다고 인식한 시점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조사하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문화와 종교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신앙하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인격적이고 관계적으로 아는 앎에 도달하지 않은 것이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살아 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들의 신앙의 대상으로서 또는 종교로서의 신 정도로 지식적 차원에서 알았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문제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여전히 지식을 넘어서는 앎의 문제입니다. 그 하나님이 세상과 나와 어떤 관계 안에 있는지를 아는 앎입니다. 친밀함의 관계 안에서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앎의 관계는 믿음으로 나타나고 순종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앎이 아니라면 믿음으로 나타나지 않을 뿐더러 나의 득과 실 등이 행동과 선택의 기준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지식적인 앎이 아닌 [יָדַע(야다)], 즉 인격적인 앎, 친밀함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그 앎은 어떻게 우리에게 형성될까요?
모세의 경우를 되짚어 보겠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을까요? 모세는 얼마나 하나님을 알고 있었을까요?
분명한 것은 처음 불꽃 속에서 하나님을 마주했던 순간보다 파라오 앞에 서 있는 지금 이 순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도 했고 기적도 경험했고 죽을 뻔도 했고 억지로 떠밀리는 것도 경험했고 예비하심도 경험했고 말씀대로 반응하는 과정을 경험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의 시간을 거절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던 것들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며 순종하면 할수록 하나님에 대해서 인격적으로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줍니다. 결국에는 우리는 나의 득과 실이 판단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판단의 기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지금의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나 알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최근에 했던 선택 중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을 때 나에게 실이 많은 상황이라면 순종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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