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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창세기

[말씀묵상] 창세기 34:1~12 “폭력의 역사 1”

by 기대어 보기를 2026. 3. 22.

[창34:1-12]
1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
2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3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4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청하여 이르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
5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
6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으며
7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8 하몰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 세겜이 마음으로 너희 딸을 연연하여 하니 원하건대 그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
9 너희가 우리와 통혼하여 너희 딸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 딸을 너희가 데려가고
10 너희가 우리와 함께 거주하되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여기 머물러 매매하며 여기서 기업을 얻으라 하고
11 세겜도 디나의 아버지와 그의 남자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 너희가 내게 말하는 것은 내가 다 주리니
12 이 소녀만 내게 주어 아내가 되게 하라 아무리 큰 혼수와 예물을 청할지라도 너희가 내게 말한 대로 주리라


 

 

 

굉장히 슬프고 끔찍한 범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과 레아 사이에서 낳은 딸 디나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디나가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나갔습니다. 그 땅의 딸들을 보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히위 족속 하몰의 아들이며 그 땅의 추장인 세겜이 디나를 보고 끌어들여 성범죄를 저지릅니다. 그리고 범죄 후 디나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였습니다. 

 

즉, 세겜은 디나를 성폭행한 이후 “너를 사랑해서 그랬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은 거짓은 아니었습니다. 세겜은 디나에게 계속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래서 디나를 데리고 아버지 하몰에게 갑니다. 디나를 아내로 삼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디나에게 일어난 끔찍한 일을 듣게 됩니다. 아마 하몰이 세겜과 디나를 데리고 오거나 해서 야곱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디나를 자신의 아들에게 아내로 달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야곱은 분노했을 법한 상황이었으나 말씀을 읽어보면 야곱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야곱은 어느 정도 재산이 있었으나 여전히 거류민 중 한 사람이고 야곱의 아들들도 지금 목축을 하러 들에 나가 있는 상황이라서 야곱이 이 일을 대응할 힘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몰은 야곱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디나를 자신의 아들 세겜의 아내로 주면 자신들의 딸도 야곱의 아들들에게 아내로 주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가족과 가나안 히위 족속이 서로 통혼하며 함께 거주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나안 땅을 살 수 있는 권한을 주어 이곳에 땅도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아주 값비싼 혼수를 요구한다 하더라도 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생각할 지점이 많은 말씀입니다. 먼저 당시의 문화와 오늘의 우리 문화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당시의 인권 의식과 오늘날의 인권도 너무나 다릅니다. 

 

우선 당시의 시대상을 보겠습니다. 하몰의 제안은 꽤 매력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이는 단지 한 쌍의 남녀의 결혼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결혼입니다. 가문과 가문 사이에 이루어지는 결혼입니다. 

그리고 그 결혼으로 야곱은 시민권과 영주권 등을 얻게 됩니다. 또한 당시에 여성의 인권은 매우 취약했습니다.

 

완전히 남성 중심의 가치관이 박힌 시대였기에 딸은 인격적인 대우를 받기보다 노동을 할 수 있는 한 사람을 다른 집안에 보내는 것이기에 ‘몸값’을 받고 권리를 이전해 주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당시에는 그러했습니다. 슬프지만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 중 지금도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폭력‘입니다. 

 

이 폭력은 계속해서 움직이면서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리스도인이 이 말씀에서 행할 수 있는 폭력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애초에 디나가 가나안 딸들을 보러 가지 않았어야 한다는 시선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가정의 딸이 이방인들의 문화에 유혹받아 그곳에 가서 그런 몹쓸 일들을 당했다고 보는 시선입니다. 

 

분명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는 말이나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데살로니가전서 5:22)‘는 말씀 등을 인용하면서 디나의 잘못을 지적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옷차림이 야해서 몹쓸 짓을 당했다는 식의 시선입니다.

 

그러나 악함은 누구에게 있었습니까? 디나가 아니라 세겜에게 있었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도 디나와 같은 시기와 반항들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도 기존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다니고 싶은 대로 다녀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분명 조심해야 할 곳, 분별해야 할 곳은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사회에 법이 있고, 어른이 존재하는 이유는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켜주기 위함입니다. 그러기에 청소년 보호법과 같은 것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디나를 비판하는 자리는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저는 예수님이라면 우셨을 것 같습니다. 한 영혼의 몸과 마음이 폭력 앞에 짓밟혔습니다. 가슴 아프고 슬픈 일입니다. 

 

두 번째 폭력은 세겜입니다. 세겜은 디나에게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성적인 폭력을 행했습니다. 힘이 있었기에 그렇게 했습니다. 지키고 보호하는 데 힘을 쓰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둘러 취했습니다. 

 

그다음 폭력은 그 이후에 사과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사랑해서 그랬다”라고 말하며 회유시키려 합니다. 물론, 그 사랑한다는 말은 진정성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틀렸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신의 욕망일 뿐입니다. 디나의 아름다움을 탐하는 마음일 뿐입니다. 어쩌면 자신의 사회적인 체면을 지키기 위해 벌인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한 족속의 족장이 이방 여인에게 범죄했다는 불명예를 안고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결혼이라는 방법을 취했을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런 행위를 정의하는 말이 나타났습니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입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심리를 흔들어서 피해자 스스로 진실을 마주하지 못하게 하는 심리적 조작입니다.

 

세겜은 디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범죄를 축소시키려 합니다. 그리고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이면서 더욱더 디나의 심리를 흔들어 놓습니다. 

 

이 말씀에는 폭력이 흐르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두 가지까지만 묵상하려 합니다. 남아있는 폭력은 다음 글에서 더 나누겠습니다. 

 

두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누군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폭력적이지 않은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누군가의 행위를 판단하고 잘못한 부분을 발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든지, 세리이든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여성이든지, 예수님은 그들 곁에서 그들이 당한 폭력에 함께 아파하실 것입니다. 

 

그런 시선이 되기를 원합니다. 누군가의 아픔을 먼저 발견하고 긍휼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여러분 주위에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2. 가족 공동체 안에 폭력의 흐름속에 나는 어디쯤에 있는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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