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1:12-14]
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13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14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이집트의 파라오는 이스라엘 민족을 학대했습니다. 학대란 [עָנָה(아나)]라는 것으로 괴롭히고 압박하고 누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파라오가 이렇게 한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을 약화시키기 위함입니다. 괴롭혀서 마음을 꺾어 놓고 민족의 정체성을 이집트에 굴종하게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더욱 번성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근심했습니다.
생각할 지점들이 많습니다.
우선 방법론적인 관점에서 보겠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나 이집트인들이 선택한 방법은 앞에서 말한 ‘지혜’로운 방법이었습니다.
이는 인류 역사가 취해 왔던 대표적인 통제 방법입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가 되어 보니 경험하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자녀의 말과 행동에 대해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개입합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가르침으로 시작하지만 자녀의 말과 행동이 부모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수위를 높여 갑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지만 때로는 폭력적 통제의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목소리를 크게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며 정서적·물리적 제재를 가합니다. 그러다 체벌까지 하기도 합니다.
이 구조는 자녀의 훈육에서부터 시작해서 사회의 정의를 유지하거나 폭력과 불의를 통제하기 위해 인류가 사용했던 대표적인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 방법의 또 하나의 특징은 타인에 대한 정서적·물리적 수위가 점점 더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통제되지 않을 때 더 강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집트인들도 그런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더 엄하게 시켰습니다. 어렵고 힘든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했습니다. 혹독하고 가혹하게 이스라엘 민족을 억압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통제가 될까요?
처음에는 어느 정도 가시 효과가 나타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그것이 정답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집트처럼 폭력과 억압을 통한 통제는 더더욱 정답이 될 수 없습니다. 아이러니합니다. 타인의 폭력이 두려워서 더 강한 폭력으로 타인을 제압하려 하고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더 강한 폭력을 사용합니다.
이는 폭력의 문제이지만 그 이면에는 ‘두려움’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집트인은 일어나지도 않은 잠재적 상황을 두려워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폭력을 가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두려움’을 양산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뜻대로 되지 않자 이집트인들은 ‘더 큰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 큰 두려움’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돌려주는 방법을 취할 뿐입니다.
두려움만 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는 오늘 본문의 다른 관점을 나누면서 찾아보겠습니다.
아이러니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왜 억압적인 상황에서 쇠약해지지 않았을까요?
왜 더 번성하고 퍼져나갔을까요?
여러 심리적, 사회적 원인을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한 가지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결코 망하게 하거나 소멸하게 두시지 않습니다.
이는 믿음 안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이것을 붙잡고 인내하며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결코 망하게 두시지 않을 하나님을 바라보며 담대한 믿음 위에 서서 잘못된 판단과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그리스도인들도 이집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두려움을 양산하는 방법을 취하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려움 앞에서 신앙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연약해지지 않았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인들이 보게 되면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는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사랑’이라고도 말합니다.
[요일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형벌을 선택하고 폭력과 억압을 선택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사랑함이 없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기 위해 걸어가신 방법이 십자가의 대속이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대속이 없었다면 우리에게는 심판만 있었을 것입니다. 죽음은 곧 두려움으로만 남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사랑이 개입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나타났을 때 죽음도, 심판의 두려움도 사랑 안에서 쫓겨납니다.
이 사랑의 완성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고 그 사랑에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할 때 열매를 맺습니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사랑할 때 그 사이에 있는 두려움은 소멸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사랑함’이라는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먼저 내려놓고, 아니 그 두려움을 주님께 맡기고 ‘사랑’을 취하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통제를 선택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으로 구원하십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 요즘 여러분에게 있는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 우리 사회에서 보이는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선택해야 하는 방법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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