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9:29-35]
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성에서 나가서 곧 내 손을 여호와를 향하여 펴리니 그리하면 우렛소리가 그치고 우박이 다시 있지 아니할지라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
30 그러나 왕과 왕의 신하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직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
31 그 때에 보리는 이삭이 나왔고 삼은 꽃이 피었으므로 삼과 보리가 상하였으나
32 그러나 밀과 쌀보리는 자라지 아니한 고로 상하지 아니하였더라
33 모세가 바로를 떠나 성에서 나가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펴매 우렛소리와 우박이 그치고 비가 땅에 내리지 아니하니라
34 바로가 비와 우박과 우렛소리가 그친 것을 보고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하니 그와 그의 신하가 꼭 같더라
35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파라오가 자신이 범죄했다 함과 이집트의 백성은 악했다는 말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그 말을 듣고 성 밖에 나가 하나님을 향해 손을 펴면 우렛소리가 그치고 우박이 없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 하나님을 향해 손을 폈을 때 비와 우박과 우렛소리가 그쳤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이후 파라오는 또 자신이 한 말을 번복합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성경은 파라오의 마음이 완악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이 아직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할 줄을 알았습니다.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알고 계셨고 모세도 파라오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박의 재앙을 멈출 필요가 있었을까요? 상대방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것을 미리 알고 있으면 거래나 계약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파라오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행동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말씀을 보니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 손을 여호와를 향하여 펴리니 그리하면 우렛소리가 그치고 우박이 다시 있지 아니할지라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
이 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모세가 파라오의 말을 들어준 이유는 파라오의 행동의 결과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재앙이 멈추고 이스라엘 백성을 정말로 내 보내거나 아니면 말을 번복하여 내보내지 않는 것은 파라오의 몫으로 그대로 남겨두고 모세는 그 결과와 상관없이 파라오의 부탁대로 이 재앙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이유가 모세의 말 속에 있습니다.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없던 비와 우뢰, 우박, 불이 이집트에 쏟아져 내렸습니다. 파라오도 자신이 범죄했다고 말할 정도의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재앙이 모세가 하나님을 향해 손을 펴자 하나님이 재앙을 멈추셨습니다.
이것 역시 세상에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이집트에도 이와 같은 자연현상과 관련된 신이 있다고 믿었지만 이 재앙은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멈추신 것이 모세를 통해 파라오 앞에서 드러났습니다.
모세의 말 그대로 세상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주관자이심을 눈앞에서 보여준 것입니다. 파라오가 그것을 보고 알게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도 종종 이와 비슷한 선택을 합니다. 결과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고 실패하거나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행동하는 일들을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이와 비슷한 일들을 하는 것 같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가끔 뭔가를 약속하며 요구를 합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을 예측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의 부탁을 들어줍니다.
그렇게 함은 자녀와의 관계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관점으로 접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 부모로서 자녀를 사랑하고 있는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약속의 중요성이나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교훈적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반응에 대한 계산으로 결정하시고 실행하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은 파라오에게 또 그의 신하들과 이집트인들에게 심판과 동시에 끊임없이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모세와 같은 선택과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손해보지 않는 계약을 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고 옳은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은 때로는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증명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둔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그와 같은 행동의 바탕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아쉽게도 또 충분히 예견한 대로 파라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완악했습니다.
이상하죠? 분명 두 눈을 보았을 텐데 그리고 알았을 텐데 왜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일까요?
이번에는 본문에 나와 있는 말씀 속에서 또 생각해볼 지점을 찾아보겠습니다.
말씀을 보니 농작물에 대한 부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보리는 이삭이 나왔고 삼은 꽃이 피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작물은 우박에 해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밀과 쌀보리는 아직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작물들은 상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는 다음 재앙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파라오나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남아 있는 희망 같은 것이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우박 재앙으로 농작물과 가축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남아 있는 작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여전히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란 한 줄기 희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집트인이나 파라오의 관점에서는 남아 있는 희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일까요?
남아 있는 희망이 아니라 아직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이 붙잡고 있는 지푸라기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자신을 돌아보니 우리도 그들과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주관자이심을 알고 믿고 있다 하면서도 물질적 풍요로움에 기대고 의지하고 있고, 삶에 대한 궁핍이나 결핍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느슨해지는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믿을 만한 것이 손에 있으면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시 하나님이 세상 주관자이심을 안다면 우리가 어떤 것을 손에 쥐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침 안개와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파라오가 우리 자신입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을 알게 하는 선택, 현명함이나 합리성보다 복음에 빚진 자의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행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 주관자임을 분명히 알고 우리가 진정으로 붙잡고 기대야 할 분이 하나님뿐임을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 알면서도 속아준 경험이 있습니까?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 그리스도인의 선택과 행동에 정말 필요한 기준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 우리 자신은 평소에 무엇에 의지하는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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