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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출애굽기

[묵상의글] 출애굽기 9:1~7 “이집트의 가축에 전염병이돌다”

by 기대어 보기를 2026. 8. 8.

[출9:1-7]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2 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고 억지로 잡아두면
3 여호와의 손이 들에 있는 네 가축 곧 말과 나귀와 낙타와 소와 양에게 더하리니 심한 돌림병이 있을 것이며
4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가축과 애굽의 가축을 구별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5 여호와께서 기한을 정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가 내일 이 땅에서 이 일을 행하리라 하시더니
6 이튿날에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시니 애굽의 모든 가축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한지라
7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본즉 이스라엘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니라

 


 

 

파리떼의 재앙에서도 결국 파라오는 다시 마음을 완악하게 닫아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모세를 파라오에게 보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으면 이집트의 가축들에게 심각한 전염병이 발생하게 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하나님은 이집트 온 땅에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집트 온 땅의 가축은 전염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고센 땅에는 한 마리의 가축도 죽지 않았습니다.

 

파라오는 사람을 보내 고센 땅의 가축들을 확인하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파라오는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이집트의 신들과 연관지어 보겠습니다.

 

이집트의 신 중에 ‘아피스’, ‘하토르’, ‘므네비스’, ‘크눔’이 있습니다.

  • 아피스(Apis)는 황소신입니다. 힘과 생명력, 왕권을 상징합니다.
  • 하토르(Hathor)는 소의 모습을 한 여신입니다. 사랑, 풍요, 다산, 가축의 보호자를 상징합니다.
  • 므네비스(Mnevis)는 신성한 황소입니다. 태양신 라와 연결되는 신으로 왕권과 힘을 상징합니다.
  • 크눔(Khnum)은 숫양 머리를 한 신입니다. 생명의 창조와 나일강, 가축, 번성을 상징합니다.

이번 재앙으로 가축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이는 황소나 숫양 등 가축의 형상을 가진 이집트의 신들의 무력함과 거짓됨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또한 고센 땅에 있는 가축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이 생명의 주권자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낸 사건입니다.

 

이번 재앙에서 특이한 점은 파라오가 이 재앙에 대해 확인 조치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고센 땅에 보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집트인의 지역과 이스라엘 백성의 지역이 확연히 구분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왜 파라오는 검증까지 했음에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을까요?

 

이런 부분은 심리학에서도 조금 설명해 줍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스스로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사기를 당한 사람은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실연을 당한 사람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도 합니다. 정치적 신념을 가진 사람도 다른 증거를 보고도 자신의 신념을 바꾸지 않습니다.

 

경제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매몰비용 효과’라고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주식 투자를 하는 사람이 손실을 경험했을 때 투자가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보다 손실을 계속 키우는 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 현상을 매몰비용 효과라 부릅니다.

 

또 확증편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답을 미리 정해 놓고 그 답에 부합하는 것만 찾으려 하는 심리입니다. 이를테면 파라오는 고센 땅에 가축이 한 마리도 죽지 않은 것을 확인했음에도 이집트 땅에도 죽지 않은 가축이 있는지 찾으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동물을 발견하게 되면 이는 우연이거나 전염병일 뿐이라고 해석하게 될 것입니다.

 

왜 이런 심리적 작용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심리학은 이런 현상을 인간의 인지 구조와 심리적 방어기제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깊은 뿌리를 ‘교만’이라 말합니다.

 

겸손하지 못하기에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자존심의 문제도 있고 사회적 체면의 문제도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의 잘못을 시인하고 틀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혹은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그 마음은 ‘교만’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잘못을 쉽게 시인하는 사람들을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반면에 고집이나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을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교만한 사람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 자존감이 불안한 사람입니다. 교만은 내가 틀리지 않아야 하며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뛰어나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반면에 자존감이란 나의 잘함이나 못함을 떠나 내 존재 자체가 존중받을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진정으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고집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파라오는 교만했습니다. 마음을 완강하게 했습니다.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표현처럼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굽히지 않고 눈앞에 드러난 사실에 대해서도 마음을 닫아 버렸습니다.

 

겸손함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이 자존감이 아니듯이, 겸손함은 자신을 비하하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시인하는 것 역시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겸손이란 자신이 가치 없거나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C.S. 루이스는 “겸손은 자신을 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덜 의식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겸손은 진정으로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 취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런 말을 했지만 바울은 스스로를 비굴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침없었고 당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자랑할 것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만큼 우리는 귀한 존재입니다. 이 관계가 우리 안에 있으면 교만할 수 없으며 열등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틀려도 맞아도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은 우리의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의 원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은 우리 존재를 단단하고 안전하게 지지해 줍니다. 이 관계 안에서 우리는 불안함을 떨쳐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스스로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 즉 자존감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평소에 실수나 잘못을 잘 인정하는 편입니까? 그렇다면 혹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존감을 가지고 겸손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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